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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리나무 Jan 16. 2021

호주에서 처음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가다

계류유산, 그리고 약물 배출

호주에서, 아니 내 인생에서 처음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갔다.


임신 8주 차에 유산된 걸 알았고, 태아는 6주 크기에서 멈춰있었다.

그리고 자연배출을 기다린 지 2주. 그동안 소량의 출혈과 세 차례에 걸친 피검사 수치는 지속적으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배출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유산과는 별도로 기관지염에 걸려 미열과 기침이 동반됐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코로나 검사도 별도로 받고 음성 판정을 받은 후에야 GP를 만날 수 있었다.


GP에게 레퍼럴을 받아 스페셜리스트를 만났다.

예전에 임신을 기다리며 한 번 상담받은 적 있던, 이 지역에선 꽤나 유명한 중국계 닥터였다.

미리 예약한 약속시간보다 30분을 더 기다린 끝에야 겨우 상담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초음파로 본 내 자궁 안에는 여전히 아기집과 태아가 그대로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조용히 울고 있으니 의사가 티슈를 한 장 건네주었다. 남편은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나중에 듣기로 남편도 초음파를 보고 울컥했다고 했다.


남은 선택은 약물 배출 혹은 수술.

의사는 내 선택이라고 어느 쪽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본인이라면 아기집 크기가 작으니 굳이 수술보다는 약물 배출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참고로 의사는 남자 선생님이었다.

남편도 기침이 심한 내 상태로 수술하다가 호스가 식도를 건드려 다칠 수 있다는 말에 약물 배출을 선호했다.

하지만.. 많이 망설여졌다. 처음 수술로 마음을 굳히고 갔었기 때문에. 결국 이런저런 생각 끝에 몸에 무리가 덜 간다는 약물 배출을 선택을 했고, 대신 진통제를 처방받았다. 평소 생리통이 있는 편이라 강한 걸로 처방해달라고 했다.


약은 싸이토텍(Misoprostol) 총 4정을 처방받았다.

흰색의 아주 작고 가벼운 약이었다. 두 알을 혀 밑에 녹여 먹고, 나머지 두 알은 24시간 뒤 섭취하라고 했다.

집에 와서 진통제를 먹고 약을 먹었다.


그리고.. 정말 끔찍했던 반나절이 시작되었다.


언제 약이 녹으려나 생각한 것도 잠시, 슬슬 배가 아파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침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뒤틀렸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구토가 시작되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설사가 미친 듯이 나왔다. 생리통이 정말 심했을 때 느꼈던 증상의 수십 배는 되는 고통이었다.


침대와 화장실을 번갈아 가다가 어느 순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손이 덜덜 떨렸고 진통은 파도처럼 몰려왔다 아주 찰나의 순간 가라앉고 또다시 강타했다. 입이 쩍쩍 말랐다. 물을 달라고 남편한테 외치고 싶었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셔도 다 토해냈다. 그 사이에 하혈은 계속 나왔다. 중간중간 덩어리처럼 보이는 것도, 그리고 흰색 무언가를 본 것도 같은 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피가 너무 많았고, 들여다보고 있기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몸이 덜덜 떨려 추웠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살려달라고. 너무 아프다고. 나도 모르게 우리 아기 태명을 계속 불렀다. 시간 감각도 없었다. 도저히 이렇게 24시간 혹은 48시간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진통제가 듣지 않음이 분명했다. 혹은 모른다. 나중에 응급실 닥터가 말하길 진통제가 들어서 이 정도 아픔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최소한 의식은 있었다고.


어쩔 줄 몰라하던 남편은 Health advice에 전화를 걸었다. 추가로 진통제를 먹어도 되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하지만 간호사는 바로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가라고 했다. 남편이 구급차를 불렀다. 나는 데굴데굴, 아니 구르지는 못하고 몸을 웅크린 채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


의료진들이 도착했다. 총 세 명이었다. 복통이 심해서 정확히 어떤 순서로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맥박을 재고, 구토를 방지하는 주사를 맞았다. 주사를 놓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고도 했다. 내 맥박이 너무 움직여서 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 체온을 재고 37.7도가 나오니 비상이 걸렸다. 남편보고 집이 덥다고 에어컨을 틀라고 했다. 이 상태로 열까지 오르면 안 된다고 했다. 무언가 배출되었냐고 물어봤는데, 내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아픈 강도를 1에서 10중 표현해보라고 했고, 패드는 몇 시간에 몇 장이나 갈았는지 확인했다. 아마 피 양을 체크한 거 같다. 그러는 와중에 진통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부축 없이 혼자 패드를 갈기 위해 화장실을 갈 수 있을 정도였다. 나중에 생각하기 론 아마 이때 이미 배출이 되었던 거 같다. 더 정확한 진단을 위해 응급실로 향했다.


하지만 남편은 코로나 때문에 동행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유산이라는 특수상황 그리고 내가 영어가 완벽하지 않다고 통역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더니 병원에서 남편 동행을 허락해줬다. 물론 구급차에는 타지 못하고 차로 쫒아왔다.

남편 말론 내가 구급대원들과 함께 집을 나서니 강아지가 미친 듯이 짖어댔다고 했다. 많이 놀랐겠지.


구급대원들은 친절했다. 여자분 한 분은 응급실로 이동하는 내내 옆에 있었는데 첫 임신이었다는 말을 듣고 유산을 겪고 있는 내 상황을 공감해주며 마음 아파했다. 체온을 다시 쟀다. 37.3도로 떨어졌다며 다들 기뻐했다. 만약 열이 37.5도가 넘었더라면 응급실에 못 들어갈 뻔했다고 했다. 가는 동안 진통은 많이 사라졌다. 눈물만 계속 났다. 아이를 갖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보내는 건 더 힘들구나. 2021년의 시작은 눈물이었다.


구급차와 와서인지 응급실에 생각보다 빠르게 들어갈 수 있었다. 구급대원들은 나를 응급실 간호사에게 인수할 때까지 내내 옆에 있었다. 어느 정도 내가 침착해지고 더 이상 아픈 기색이 없으니 그중 스코트랜드 출신이라는 중년의 남성 대원은 남편과 나와 농담까지 주고받을 정도였다. 기분 나쁘진 않고 오히려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한국 이야기, 본인의 고향 이야기, 직업이야기.. 내가 강아지 밥을 걱정하니 대원들이 웃었다.


병실에 들어가서는 닥터를 만나기까지 오래 기다렸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의사가 나 하나만 케어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환자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산부인과 전문의가 아니라 엄청 자세하게 내 상태를 듣더니 본인 동료에게 물어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또 한참 기다렸다. 도와주는 간호사들은 모두 친절했다. 정신이 없어 맨발로 집에서 나왔던 터라 양말도 빌리고 패드도 새로 받았다.


혹시 모를 감염을 대비해서 소변검사 그리고 무언가 기구를 질 안에 넣어 검사를 했다. 정확히 뭐였는 지는 모르겠다. 의사 말로는 내가 겪은 모든 증상은 이 약을 먹으면 기대되는 증상이라고 했다. 다만 그 정도가 사람마다 다른데 내가 심하게 느낀 거 같다고. 초음파 검사를 요청했지만, 이렇게 빨리 배출되었을 리가 없다며 남은 약을 마저 먹던가 아니면 스페셜리스트를 만나 수술을 하라고 했다. 죽어도 그 약은 못 먹겠다고 했더니 그럼 내일 전문의를 만나 수술을 하라며 레페럴을 적어줬다. 그 후로도 이대로 퇴원해도 되는지 아니면 하루 입원해야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런저런 검사를 더 하며 상태를 지켜봤다. 난 여전히 배는 아팠지만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생리통이었고, 집에 가고 싶었기에 마침내 퇴원 허락이 떨어졌을 때는 반가웠다. 다만 혹시라도 배출이 안 돼서 헛고생을 한 것일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마지막으로 혈압을 재고 어지러움을 느끼는지 확인하고 레퍼럴을 받아 5시간 만에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지쳤고 허했고 피곤했다.


집에 와서 미리 사둔 미역국을 데웠다. 아침 외에 종일 굶었기에, 그리고 피를 한없이 쏟았기에 먹어야만 했다. 혹시 몰라 미리 준비해뒀는데 잘한 선택이었다. 밤이 돼서 우리를 본 강아지는 미친 듯이 낑낑거리며 울어댔다. 남편과 서로 너무 고생했다며 토닥였다. 식사 후 남편이 스페셜리스트에게 이메일을 미리 보내 두었다. 그리고 피곤했는지 바로 곯아떨어졌다. 나는 진통제를 먹고 잠을 청했다. 너무 많은 일을 한 번에 겪어선 지 몸은 피곤하지만 잠은 안 올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닥터에게 새벽 3시에 회신이 왔고 바로 병원으로 갔다.

초음파를 했고 더 이상 둥근 아기집과 태아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배출이 되었다고 했다. 대신 길쭉한 하얀 무언가(태반인 거 같다)가 남아있는데, 이걸 완전히 빼기 위해선 약을 보통 마저 먹는다고 했다. 수술은 지금 상황에선 의미가 없다고 했다. 난 거절했고, 자연 배출되길 기다리기로 했다. 피는 여전히 계속 나고 있었기에.. 제발 이대로 배출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1주일 뒤 피검사와 초음파를 다시 하기로 하고 병원을 나섰다. 만약 이러고도 배출이 되지 않았다면 얼마나 허탈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약물 배출은 하지 말라, 혹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의사의 말은 논리적이었고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 수술보단 당연히 몸에 무리가 덜 갈 테니, 통증이 덜하다면 약물 배출도 꽤나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본다. 다만 나에게는 맞지 않았을 뿐. 모든 사람이 나처럼 심한 고통을 겪는 건 아니라고 한다. 다만 과학적으로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생리통이 심하다면 다른 방법을 추천하고 싶다.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나의 유산.

아마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일 거다. 나 또한 그랬다.

그리고 굳이 알 필요 없는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 또한 유산으로 아파하는 누군가를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기록하지만 차라리 볼 일이 없으셨으면 좋겠다.


여담으로 응급실에서 돌아오는 길, 남편은 진지하게 아이 없는 삶은 어떻겠냐고 물어봤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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