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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의 영화 감상 2 - 에필로그

나는 그 독하다는 감정담금주를 마시고도 끝끝내 살아남은 흡혈귀다.

by stephanette

“나는 그 독하다는 감정담금주를 하이볼로 마시고도,

끝끝내 살아남은 흡혈귀다.”

— 『흡혈귀의 영화 감상』 마지막 장에서


이제 책장을 덮으며
나는 조용히 침을 삼킨다.

아니, 감정을.
피와 담금주의 하이볼을 섞은
내 나름의 생존 방식.

영화는 내 감정을 걸러주는 체였다.
사랑, 분노, 상실, 수치심, 부끄러움, 우울…
말로 못하는 것들은 화면에서 대신 울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그 감정들을 썰어 먹었다.
우아하게. 시니컬하게.
끝내 살아남기 위해.


하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질문들이 있다.


어째서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가?
왜 삶은 매일이 고통의 바다 같은가?
왜 의미 없는 생을 끝까지 붙잡고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왜 나는 이 지구별에서
하필이면 철인 29호를 만나야만 했는가?


이 모든 질문들을 담다 보니,
책 한 권으론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흡혈귀의 영화 감상 2』를 쓰고 있다.

어째서 삶은 늘 쓴맛으로 입을 열고
침묵으로 입을 닫는지.
왜 감정이란 건 언제나 너무 늦게,
혹은 너무 이르게 도착하는지.

오늘도
감정담금주와 피의 하이볼을 마시며
도자기 파편 가득한 공방에 틀어박혀
또 한 편의 영화를 본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대들은 부디,
나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폐업 중인 감정 도자기 공방 한 켠에서
릴리시카 드 노스페라투 바르디엘,
500살 먹은 감정 연금술사.


오늘도 질문을 쓰고, 영화를 삼킨다.
끝…은 아니고,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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