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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의 영화 감상
-12,775편의 감정

영화에 사로잡힌 자의 자서전 서문

by stephanette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제 삶에 대한 스포일러는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나는 1990년대 이후로

1일 1편 이상의 영화를 봐왔다.

정확히는,

그보다 더 많은—말하자면,

밤을 새워 시리즈를 몰아보고,

중간에 끊기면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그런 성격 탓에

단순 계산한 숫자로 따져도

벌써 12,775편이다.


왜 그렇게까지 봤는지는 잘 모르겠다.

몰입하면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간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내 인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그 시절—

‘오늘 저녁 메뉴’가 가장 중요한 고민이던 날들 때문이었을지도.


그랬던 내가,

일에의 열정도, 의미도 내려놓고,

운동도 멈추고,

철인 29호에게도 “아듀”를 말한 이후엔

헛헛함에 미칠 것 같아서

결국 다시 영화를 꺼내어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왓챠 초창기에

한줄평 몇 개 쓰다

“아는 영화평을 어떻게 다 써” 하고 포기했던 사람이

이제는 하루치 감정을

영화 한 편으로 풀어내고 있다.


치유라니, 웃기지.

치유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지금 내가 하는 건 딱 그것이다.


2천 개가 넘는 영화들이

머릿속에서 난리법석을 피우고,

생각은 손보다 빠르고,

손은 감정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나는 오늘도 써야만 한다.

왜냐고?

이게 아니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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