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지난 10월 3일 개봉했던 내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는 장애를 가졌지만 음악에 대한 꿈은 누구보다 강렬한 한 초보 뮤지션의 음악적 성장기이다. 주인공의 장애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의 음악에 대한 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방향은 아니었다.
2016년부터 촬영을 시작했던 이 프로젝트는 장애인 뮤지션이 음악을 통해 장애를 극복해낸다는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리고 출발했다. 장애인의 장애에 대해 더욱 깊은 공감대를 가지고 접근하고 싶었고 그만큼 의욕도 넘쳐났다.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기타리스트 김지희 씨는 지적장애인이다. 사회성과 학습능력의 부족으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다른 신체적 장애에 비해 겉으로 드러나는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다 보니 장애가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을 받아야 하는 부수적인 어려움도 같이 겪는다. 지희 씨는 그런 환경 속에서 기타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가족을 제외한 타인과의 소통이 거의 없던 그는 무대 위에서 사람들에게 기타연주를 들려주고 관객의 반응을 보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그럴수록 자신의 뮤지션으로서의 성장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금 더 나은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은 것. 하지만 지적장애는 그런 예술 세계의 확장에 호락호락한 조건이 아니다. 지적장애인에게 창의력 발휘는 거대한 벽 같은 것이었다.
"지희는 본인의 기타 실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감정 표현이나 그런 게 아직 부족한 거 같아요."
"감정 표현이 안 되고 있는 것 같애?"
"그런 거 같아요."
"지희는 목소리를 크게 한 번도 안 내봤어?"
"예..."
"바닷가에 가서 야호 해보고 싶지 않아?"
"해보고 싶어요, 해보고 싶어요."
지희 씨는 모든 것이 작다. 모든 행동이 작고 소심하다. 목소리는 바로 곁에 있지 않으면 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다. 기타리스트임에도 그의 기타 연주는 너무 작은 소리를 낸다. 그러한 작은 소리로는 감정이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희 씨와 함께 바다를 찾아갔다. 바다를 향해 시원하게 소리를 내질러보면 지희 씨의 표현의 크기를 더 증폭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날 바다에서 지희 씨는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몇 차례 용기를 내며 시도해보지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여리고 작은 목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그날 지희 씨의 표정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소리를 질러보자며 온 바닷가에서 시원하게 지르지도 못하고 있는데 표정이 너무나 행복했다. 얼굴의 모든 근육을 사용하여 활짝 웃는 모습. 나는 그 순간 지희 씨의 모든 감정이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지.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희 씨는 언제나 항상 감정 표현을 해왔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저 그 크기가 약간 작았을 뿐이었다. 그 작음이 문제라고 생각했고 그 문제가 그의 장애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 표현의 크기를 키워주는 것이 그의 장애에 공감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건 착각이었다.
감정 표현의 크기라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크기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었던가? 우리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치 이상의 크기로 표현을 해야 한다는 표준이 제정되어있었던가? 왠지 있을 것 같지만 없다. 있을 것 같다는 그 느낌. 그게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이었다.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던 나마저도 장애를 그런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그날 깨달았다.
나는 그 바닷가 촬영 이후로 지희 씨의 작은 표현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역시 그 안에서 다양한 감정들을 읽을 수 있었고 기타 연주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음악에 대한 꿈. 그 꿈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두 각자 가지고 있는 꿈과 조금의 다름도 없었다. 그가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다르게 꾸는 꿈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날로부터 이 프로젝트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내 손에 들려있는 카메라가 관찰하는 중심에는 지희 씨의 장애가 아니라 음악에 대한 그의 꿈이 담기기 시작했다. 그것이 장애가 있든 장애가 없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다른 소수의 성이든, 어떤 계급과 지위의 사람이든 그 사람을 한 명의 온전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태도임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