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잡지 에디터 2일 차
오전에는 7월호 제작을 위한 기획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 줄 알고 나는 첫날과 같이 일찍 도착해서 당일 처리할 업무를 검토하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내 모니터에는 누가 봐도 '업무 중'임이 분명했다. 파일들을 이것저것 열어 가며 한창 집중하고 있던 찰나, 나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를 대표가 아침부터 나를 다그쳤다.
"신입이 되어가지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뭐 하는 거야? 김 팀장 회의 자료 준비하는 거 안 보여? 빨리 같이 도와."
억울했다. 우선 김 팀장님의 자리는 나의 옆 옆이기 때문에 모니터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그분이 무얼 하고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전날 갓 들어온 신입이 상사가 무슨 일을 처리하는 줄 알고 감히 손을 대겠는가. 누가 들어도 무리한 요구였다.
하지만 어쩌겠나. 화들짝 놀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 팀장님께 향했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나요? 뭐라도 주세요..."
아직도 사무실을 나가지 않은 대표의 눈치가 보여 계속 김 팀장님 곁에 서있었다. 대표가 저 멀리 가서야 김 팀장님은 "사실 별 거 없어요. 그냥 앉으셔도 돼요"라며 나를 다독였다. 서럽다, 서러워.
회의는 9시 10분이 되어서야 시작됐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아이디어 제시하라고 하면 어쩌지?' 아침부터 떨어진 불호령에 마음이 급해졌다. 대표, 본부장, 상무, 두 명의 김 팀장, 내 사수 그리고 나로 구성된 기획 회의에서는 다행히도 나에게 특별한 제안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원래 계셨던 김 팀장님과 사수가 이미 7월호의 구성을 대충은 짜 놨기 때문이다.
회의 중간에 웃긴 일이 하나 있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잡지 페이지 수가 예전보다 대폭 줄었다. 하지만 대표는 분량을 늘리고 싶은 모양이다. 전염병으로 관광을 제한했던 여러 나라들이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하는 것을 노려, 7월호에는 해외 여행지를 주로 소개하는 새로운 코너를 추가하기로 했다.
대표는 코너를 추가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했고, 성격이 급한 편인지 코너명을 당일 회의에서 바로 정하자며 우리를 독촉했다. 회의에서 주로 의견을 제시했던 본부장과 상무는 자꾸만 다른 코너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말을 돌렸고, 회의는 그것에 대해 의논하다 다시 코너명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참지 못한 대표가 말했다.
"그래서 새로운 코너명은 무엇이 좋을까요?"
잠깐 동안 이어진 침묵에 다들 눈만 굴리는 꼴이 우스웠다. 그러자 아이디어가 문득 떠올라 겁도 없이 손을 들었다.
"---은 어떤가요?" 사실 손을 들면서 '설마 이게 채택되겠어?' 싶었다. 입사한 지 이틀 된 새파란 신입 사원의 아이디어를 받아줄 리 없지.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내가 제안한 코너명이 채택되었다. 아직은 가제지만 말이다.
1시간 넘게 이어진 회의 끝에 대표가 말했다. "자, 김 팀장이랑 송기자. 오늘 처음으로 기획 회의를 해본 소감을 말해 보세요." 참 별 걸 다 시킨다 싶었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여행 잡지다 보니 부산 얘기가 자꾸 나왔다. 내가 부산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회의 내내 나를 '부산'이라고 불렀다. 그게 거슬렸던 것이 생각 나 이렇게 말했다.
"아까 자꾸 부산이라고 하셨는데, 앞으로 '저' 하면 전국 각지가 생각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나의 이름은 '전국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