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잡지 에디터 7일 차
아침부터 메일함을 확인했다. 전날 상무님의 지시로 작성한 과업지시서가 파주시에 잘 전달됐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나와 대표를 숨은 참조에 넣을 거라더니, 정말로 그렇게 했다. 기자가 둘 뿐인 우리 회사에서 팀장님도 아닌 내가 이런 일을 맡게 되다니. 대표 옆에 적힌 내 이름 석자가 뿌듯했다.
회사 생활 2일 차만에 나름의 성과를 올린 일이 있다. 이번 달 잡지에 새로 만들어질 코너의 제목을 정하는데 내 아이디어가 채택된 것이다. 당시에는 가제라고 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모두들 그 이름을 부르며 업무를 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내가 정한 코너 제목, 내가 쓸 글이 전부 이번 호 잡지에 얹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 해외 여행지로부터 자료 요청을 해서 받아 보니 분량이 상당했다. 그래서 욕심을 부렸다. 2페이지로 돼있었던 분량을 6-8페이지로 늘려 달라 요청했다. 새로 온 팀장님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제는 본부장님의 승인만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며 열심히 코너 구성을 잡았다. 기존 코너들은 이미 구성이 정해져 있어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었는데, 이 코너는 달랐다. 제목, 글, 디자인 틀까지. 전부 내 손길이 들어가게 해야지.
한창 구성에 열을 올리고 있던 때에, 새로 온 김 팀장님이 말을 걸었다.
“그, 새로 만드는 코너... 기존대로 2페이지로 하기로 했어요. 많아도 4페이지?”
알겠다, 했지만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 잡지에는 영어 번역이 들어가는 데다, 신입이라 커버스토리도 맡을 수 없어 분량이 적은 주변 기사들을 주로 쓰는데 이 기사들로는 나의 실력을 보여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욕심을 부린 것인데, 욕심은 정말 욕심이었나 보다. 아침부터 높았던 사기가 한풀 꺾였다.
한편 김 팀장님은 오후에 충남 부여로 취재 가는 일정이 잡혀서인지 바빠 보였다.
‘좋겠다. 나도 가고 싶다.’
부러운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기자의 꽃은 생생한 취재거리를 담아올 수 있는 ‘취재’라고 생각하는데, 시국이 시국이라 국내에 갈만한 행사가 대부분 취소돼 신입인 나는 취재 갈 기대를 접고 있었다. 그때, 다른 김 팀장님이 내 부러운 기색을 알아챘는지 같이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 제안했다. 당연히 사무실 근무라 생각하고 간단히 미니 크로스백 하나만 달랑 매고 왔지만 이게 무슨 상관이랴. 제발 승인이 떨어졌으면. 제발!
결과는? 오케이다.
잔뜩 들떠 홀로 먹는 점심도 이 날은 꿀맛이었다. 1시에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카메라 가방, 잡지 한 권 챙겨 팀장님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이제 회사 문만 나서면 되는데, 본부장님이 우리를 붙잡는다. 오늘의 일정은 오후 늦게 부여에 도착해 밤늦게까지 취재를 하고 남원에 있던 대표님 차를 얻어 타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표님이 사정이 생겨 태워줄 수 없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부여에서 서울로 오는 시외버스는 8시 30분이 마지막이라 오늘의 취재는 결국, 취소되었다.
취재는 다음 날에 가기로 결정됐으나 잔뜩 부풀었던 마음은 한번 꺾인 이후에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는 오후, 자료는 많아도 전부 쓸 수 없는 새로운 기획 기사와 부여 야경 사진만 대충 훑어보았다. 오늘의 사기는 완전 바닥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