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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Jun 17. 2020

엑셀 모지리

여행잡지 에디터 6일 차

꿀 같은 주말을 보내고 다시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썩 가볍진 않았다. 업무도 저번 주에 빠르게 쳐내서 일도 별로 없는데, 이번 주 평일은 또 어떻게 보내나. 점심은 또 뭘 먹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회사에 도착했다.


인스턴트커피 두 봉지로 오전에 먹을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놓고 오늘의 할 일을 살펴보고 있었다.

“월요일 9시부터 대청소 있는 거 아시죠?”

팀장님의 물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멍청이, 일주일 만에 업무를 잊다니. 정신 차리자.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열심히 쓸었다. 다음은 걸레로 계단 손잡이를 닦아야 한다. 손 닿는 곳은 모두 꼼꼼히 닦고 있는데  아래서 사장이 내게 외쳤다.

“송 기자, —해서 고마워!”

“네?” 뜬금없이 대체 뭐가 고맙다는 말이지?

“열심히 해줘서 고맙다고!”

당황스러웠다. 머쓱하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답하긴 했지만 살면서 ‘고맙다’는 말이 이렇게 찝찝하게 들리기는 또 처음.


청소를 마치고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상무님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불안을 유발하는 정체불명의 첨부파일들과 함께. “안 바쁘면 잠깐 볼까요?”


똑똑.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상무님이 날 반겼다. 아직 회사를 전부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캐릭터가 상무님이다. 우선 좀 멍해 보인달까. 아직까지 이 사람으로부터 날 선 모습은 보지 못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페이크(fake)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 앞에서 “나는 뭐하던 사람 같아요?”, “봐, 나는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그래서 이건 송 기자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며 은근슬쩍 일을 시키는 것이 아주 영리하다는 증거겠지.


어쨌든 이 여우 같은 상무가 내게 일을 맡겼다. 파주시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DMZ를 홍보하려 하는데 우리 잡지가 담당하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 ‘과업지시서’라는 것을 써야 하는데, 일단 이 문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샘플을 참고해 내용을 뜯어고쳐 다시 전송하니 “아주 잘했다”며 다시 나를 부르고는 수정 사항을 알려줬다. 그리고 다시 은근슬쩍 들어오는 질문,

“혹시 엑셀 잘해요?” 이 질문에 못 한다고 하면 일 안 시키겠지? 싶어 솔직하게 답했다. 그리고 정말 못 하기도 하고...


하지만 내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때부터 시작된 상무님과의 1:1 엑셀 과외 수업. 이 아이를 가르쳐 내 일을 줄이겠다, 는 상무님의 의지가 엿보였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 같은 엑셀 모지리한테 기대를 걸어주셔서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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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D8, 2, 5)

ctrl+shift+8


... 역시 모지리라 이 정도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열심히 해보자, 모지리 탈출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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