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잡지 에디터 8일 차
오늘은 아침부터 바쁘게 부여로 떠났다. 남부터미널에서 아침 10시 반 차를 타고 2시간을 달려 도착한 부여는 사람이 붐비는 서울과는 딴판으로 한적했다. 터미널에는 사람이 조금 있었으나 그것도 잠시 뿐. 짐을 챙겨 각자 갈길을 찾아 떠나고, 이내 우리만 남았다.
원래 일정은 터미널 근처 시장을 먼저 들르는 것이었으나 코로나 때문인지 혹은 작은 도시라서 그런 것인지, 시끌벅적한 장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계획을 변경해 부소산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행으로 왔더라면.'
계획에도 없었던 등산을 하며 내내 든 생각이다. 부소산 사방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그곳의 정취를 느끼기보다는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는 강박이 앞섰다. 여행으로 왔더라면 조금은 더 여유가 있었을 테지. 하지만 오늘 안에 어떻게든 부여에 관한 자료를 많이 모으고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의무감을 짊어진 채 오전 내내 부소산성을 등반하고 찾은 7,000원의 행복. 낙화암 아래 고란사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10분 여만에 구드래 선착장에 도착한다. 몇 걸음만 옮기면 바로 보이는 '장원 막국수'.
부소산성을 오르면서 앞서 가는 팀장님을 따라잡으랴, 사진도 찍으랴 물 마실 겨를이 없어 배는 고팠지만 입맛이 돌지 않았다. 하지만 새콤달콤한 막국수를 생각하니 바로 군침이 돌고, 굶주린 나는 8,000원 짜리 곱빼기를 주문했다.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식대가 7,000원이지만 '천 원쯤이야.' 내 돈으로 내지 생각했다.
이윽고 나온 막국수. 생각보다 상당한 양에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정말 배가 고프긴 고팠나 보다. 국물만 조금 남겨 놓고 전부 해치웠다.
30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급하게 식사를 마쳤다. 아직 가야 할 곳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쉼의 맛을 알아버린 발은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오전과 달리 조금만 걸어도 발바닥과 종아리가 욱신욱신 저려 왔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팀장님이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았으니까. 상사가 저리 씩씩한데 내가 힘든 티를 낼 수는 없지. 계속 걷고, 찍었다.
신동엽 문학관은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 아주 맘에 들었다. 보통 이런 전시관에 가면 늘 보이는 설명판(?)들에 쓰여 있는 글은 지루하기 짝이 없어 잘 읽지 않는데, 이 곳의 설명들은 그렇지 않았다. 역시 글쓴이의 공간다웠다. 4월의 시인, 신동엽의 지난 발자취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옷가지와 장서들도 많이 있어 부여에 온다면 꼭 한번 들러볼 만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문학관 다음으로 정림사지로 향했다. 교과서에나 봤던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생각보다 컸다. 지어질 당시에는 선명했을 글자의 흔적도 남아 있어 과연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호기심이 들었다.
"우와. 정말 크네요."
입까지 벌리며 감탄하는 나를 보고 팀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황룡사 9층 목탑이 남아 있었다면 이것과는 비교도 안 될 거예요."
드디어 우리가 부여에 온 목적. 궁남지에 도착했다. 발은 이미 부을 대로 부어 아픔에 무뎌질 지경이 되었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팀장님이 나보고 뜻밖의 제안을 한다.
"잡지 들고 왔죠? 이제 송 기자가 사람들한테 인터뷰 따면 됩니다."
... 예? 뭘 하라고요?
아니, 언제부터 인터뷰가 내 몫이었나. 나는 당연히 팀장님이 할 줄 알고 질문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신입은 이것 시키면 이것과 저것을 둘 다 가져다 드려야 하는 자세로 임해야 하지만, 하루 종일 카메라를 매고 걸은 나는 솔직히 말하면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꾀를 부렸다.
"네. 그런데 팀장님이 먼저 시범 좀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그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난감한 표정의 팀장님. 직감적으로 팀장님도 자신이 없다는 것을 캐치했다. 하지만 그것을 신입에게 들키기 싫었는지 주변을 살짝 둘러보고는 아이를 둘 데리고 산책 나온 듯한 시민 분에게 접근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에서 나왔는데요. 부여 축제가 취소돼서 대신 야경을 찍으러 왔습니다. 혹시 협조해주실 수 있을까요?"
시민 분은 시국이 이럼에도 낯선 이가 묻는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주셨다. 그러나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묻자 곧장 난감해하는 표정. 팀장님은 노련하게 조금 더 정신을 빼놓고는 나보고 얼른 사진을 찍으라고 눈짓했다.
"자. 찍겠습니다. 한 장이면 됩니다. 감사해요!"
친절한 시민 분을 이용하는 것 같아 찍으면서도 영 찝찝한 것이, 마치 사기꾼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듣보 잡지 기자로서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겠지.
서울로 가는 차에 몸을 실은 시간은 저녁 8시 30분. 퉁퉁 부어 버린 발을 신발에서 간신히 꺼내 조물거리며 잠에 든다. 눈을 뜨면 서울에 도착해 있을 테고, 집에 도착하면 또 뻗겠지. 그리고 눈을 뜨면 다시 회사. 오늘 하루, 자유 아닌 자유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것은 진정한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여행잡지의 낭만으로부터 한 발짝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