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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프디 Nov 19. 2022

나의 얄팍한 홍상수론

홍상수 <생활의 발견> (2002년) 을 보고...

최근 1년간 너무 영화를 안 본 것 같다. 1년 동안 100편도 보지 않은 것 같다. 전에는 300편은 훌쩍 넘겼건만. 왜 이렇게 영화를 보지 않았나 생각해봤다.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가만히 2시간을 앉아 스크린만 보고 있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해야 할 일은 언제나 밀려있는데, 영화를 보는 건 그 일을 모두 끝낸 후가 되어야만 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영화를 미루고 미루다 보니, 자연스레 보는 영화의 수가 줄었다. 하지만 이제 영화과 대학원에 들어갈 것이고, 앞으로는 직업인 영화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서 더 이상 영화를 보는 일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그래서 앞으로 못 해도 이틀에 한 편의 영화는 꾸준히 보려고 한다. 또 영화 일기를 쓰려고 한다. 비평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매우 개인적이고 근거 없는 주관적 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민하지 않고 한 번에 죽 써 내려가려 한다.


오늘은 <생활의 발견>을 봤다. 횟수로는 두 번째 보는 것이고 홍상수의 신작이 나오거나 관련 비평을 읽을 때 이 영화가 언급되면 가끔 몇몇 장면을 돌려보곤 했다. 이번에는 <극장전>(2005년작) 비평을 읽다가 어김없이 이 영화가 언급되어 다시 보게 됐다. <극장전>의 동수(김상경 분)의 대사 "저건(남산타워) 어디서나 보이네."가 <생활의 발견>의 경수(역시 김상경 분)의 대사 "저건(오리배) 어디서나 보이네."의 반복이라는 비평을 읽었다. 차이와 반복이라는 홍상수 영화의 미학은 한 영화 내에서뿐만 아니라 본인의 필모그래피를 하나의 영화처럼 묶어 이루어지는 것 같다. 뭐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리 길지도 않은 영화이고 처음 봤을 때의 기억도 좋아서 영화를 다시 보게 됐다.


개인적으로 홍상수 영화에 등장했던 남배우 중에서 김상경 배우를 제일 좋아한다. 김상경뿐만 아니라 이선균, 정재영, 유준상 등이 그의 영화에 출연했었는데 그중 김상경 배우가 가장 좋다. 가장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댕댕미가 있다고나 할까? 하여간 그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사춘기 애처럼 찌질한 대사를 던질 때 내 안의 김상경을 발견하고 연민을 느낀다. <극장전>에서 죽기 싫다고 하는 선배를 보며 징징대는 동수를 봤을 때 그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분위기와 직전까지 영실(엄지원 분)에게 찌질하게 매달리던 그가 급작스럽게 짜내는 울음 때문인지 가서 안아주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홍상수 영화가 으레 그러하듯 <생활의 발견>에서도 대화 같지 않은 대화가 등장한다. 물음과 대답이 호응하지 않는 대화 말이다. 예컨대, 경수와 선영의 첫 번째 섹스씬의 대화가 그렇다. 대사를 옮겨 적기 민망할 정도로 외설적이고 적나라하니 주의 바란다. (홍상수 영화를 논하려면 섹스라는 단어를 난발하는 섹무새가 될 수 밖에 없다. 잠자리, 관계, 애정씬 같은 순화된 단어는 홍상수 영화의 정수에 접근하는데 방해만 된다. 이해 바란다.)


경수 "살살하는 게 좋아요? 세게 하는 게 좋아요? 어느 게 좋아요?"

선영 "둘 다 좋아요."

경수 "이렇게 돌려도 좋아요?"

선영 "거짓말한 거예요, 경수 씨?"

경수 "네."

선영 "안에다 싸지 말아요."

경수 "네 그럼요. 저 이렇게 돌리는 것도 좋아요?"

선영 "나 아기 배는 거 싫어요."

경수 "그럼요 걱정하지 마요. 사랑해요."

선영 "나도요."


선영은 '돌려도 좋으냐'는 경수의 물음에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이 씬이 끝나고 챕터를 나누는 제목이 등장한다. "경수가 회전문의 뱀을 떠올리다." '돌려도 좋으냐'는 경수의 물음은 대답을 받지 못했지만, 경수는 '돌려도 좋으냐'는 자신의 말 때문에 뱀이 돌고 돌아 생긴 청평사의 회전문을 기억해 낸다. (참으로 낯 뜨거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하여간 많은 대화에서 이런 식으로 물음과 대답이 호응하지 않는다.


비단 대화뿐만이 아니라 장면과 장면의 연결도 호응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장면 연결의 필수요소인 인과관계가 없다. 예컨대 '솥뚜껑 삼겹살집' 장면에서, 경수는 식당 아주머니가 깨뜨린 컵의 잔해를 치운다. 손이라도 베든지, 아주머니가 고맙다고 서비스라도 주든지 해야 할 텐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 사건은 해당 장면에서 시작해서 그대로 끝난다. 또 경수가 선영의 남편에게 협박문을 보내는 장면도 아무런 인과 관계를 갖는 장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 협박문을 남편이 읽긴 한 건지, 어디로 날아가 사라져 버려 남편에게 전달되지 않은 건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선영이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자가 맞는 것 같다 추측할 뿐이다. 아무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을 행위를 굳이 경수에게 시키는 홍상수의 의도가 무얼까. 여러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홍상수 영화는 기본적으로 앞의 사건이 뒤의 사건을 만들어내는 필연적 전개를 믿지 않는다. 그런 전개가 세상의 원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을 가감 없이 그대로 영화에 담으려 한다.


박찬욱의 각본을 공동 집필한 정서경 작가가 한예종 재학 당시 홍상수의 시나리오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홍상수는 아무런 스토리의 법칙을 가르치지 않았고, 다만 '언제나 진실될 것'만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이 써온 시나리오를 평가할 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이 '네가 쓴 시나리오 속 세상처럼 정말 세상이 그러하다 믿느냐?'였다고 한다. 그만큼 홍상수는 자신이 믿는 세상의 원리에 충실하여 영화를 찍는 감독이다. 앙드레 바쟁이 한 말, "영화는 세상의 반영이다." 그 말을 누구보다 잘 실천하는 감독이 홍상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부 관객의 악평과 가십을 끌어들인 조롱과 멸시에서 고개를 돌리고 자신이 정말 믿는 세상을 영화에 그대로 반영하려고 누구보다 애쓰는 감독이다. 그런 태도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배워야 한다 생각한다.


각설하고, 필연을 믿지 않는다면 우연이 난무할 터인데 어떻게 영화를 진행시켜야 할까? 스토리의 법칙에 따르면 인물은 욕망이 있어야 하고 그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여러 행동을 해야 한다. 그 행동의 결과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의 결과 인물의 욕망과 현실은 거리를 좁히거나 넓히며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진다. 그게 모든 스토리의 뼈대라고 할 수 있다. 홍상수는 인간의 짝짓기 본능에 의지한다. 경수는 선영과 자고 싶어서 그를 중학생 때 만났던 일을 기억한다고 거짓말한다. 짝짓기 본능은 홍상수 영화를 진행시키는 중심축이다. 그렇다고 짝짓기의 성공과 실패를 영화의 주요 소재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는 짝짓기를 하려는 인물의 욕망을 동력으로 영화의 시간을 진행시키고 그 사이 짝짓기와 아무런 관련 없는 디테일들을 끌어와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한다.


홍상수는 앞서 말한 스토리의 법칙에 관심이 없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의 욕망이란 영화 전반에 걸쳐 인물이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 욕망은 시시각각 변한다. 경수는 자신을 캐스팅하지 않은 감독의 사무실에 찾아가 출연료를 받아낸다. 별다른 이유 없이 춘천으로 가 선배 성우와 시간을 때운다. 그러다가 성우의 썸녀(?)인 명숙을 만나 섹스를 한다. 명숙의 사랑을 거절하고 기차에 올라 우연히 선영을 만난다. 선영과 섹스를 하고 싶어 그의 뒤를 밟고 결국 섹스에 성공한다. 두 번째 섹스는 실패하고 선영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점집에 들러 점을 친다. 점을 치고 나와 선영은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오겠다는 선영의 말에 그를 기다리며 경수는 비를 맞는다. 자, 이 영화 전반에 걸쳐서 주인공 경수가 추구하는 단 하나의 욕망은 무엇일까? 없다. 다만 경수는 그때그때 섹스를 하고 싶을 뿐이다. 홍상수 영화는 애초에 인간이 대단한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전진하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하는 생각의 틀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를 진행시키기 위해 필요한 인물의 욕망은 당연 짝짓기 본능만 남는 것이다.


짝짓기 본능을 동력으로 인물은 행동을 한다. 이때 짝짓기 본능의 결과인 섹스는 사실 홍상수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다만 일상에서 반복되는 행동과 대사, 장소, 오브제 등을 곳곳에 배치하여 리듬을 만든다. 그렇다. 그의 영화는 결국 리듬이 중요하다. 의미가 아닌 리듬 말이다. <생활의 발견>에서 춘천에서 경수는 명숙과 섹스를 두 번 하고, 이후 경주로 장소를 옮겨 선영과 섹스를 두 번 한다. 그 반복 사이에 차이는 춘천에서는 명숙이 경수를 사랑했다는 것이고, 경주에서는 경수가 선영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사랑이라? 물론 여기서 말한 사랑은 로맨스 영화에서 말하는 종류의 사랑은 아니다. 단지 짝짓기 본능의 심화 버전이랄까? 하여간 이러한 반복 속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같은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장소와 대상이 바뀌면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사실 완전히 달라진다. 그 결과 드러나는 건 의미를 찾는 행위의 무의미함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홍상수 영화는 '무의미를 의미로 갖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의미, 즉, 주제가 무의미라는 뜻이다. 홍상수 영화가 모두 다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대강 2010년대를 전후로 그의 영화가 변한 것 같다. 지금은 그래도 무언갈 믿는 것 같다. 그것이 사랑인 것 같기도 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심 어린 대화 같기도 하고...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년)을 보면 확실히 그러하다. 그럼에도 그의 초기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년)부터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년)까지는 무의미 자체가 그의 영화의 주제였다. <생활의 발견>도 마찬가지.


그래서 추천하느냐고 묻는다면 강하게 추천한다. 분석하려 하지 말고, 판단하려 하지 말고, 그냥 즐기면서 보면 정말 재밌다. 인간과 세상은 이러이러해야 한다... 는 생각의 틀을 잠시만 내려놓고 일탈을 해보는 거다. 그런 경험은 어디서도 할 수 없다. 그러니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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