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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프디 Nov 24. 2022

<아마겟돈 타임>, 그레이 형의 '쉬어가는 타임'

제임스 그레이 <아마겟돈 타임> (2022)

제임스 그레이라는 이름은 믿고 보는 이름이다. 그의 영화가 개봉했단 소식을 듣고 아무 리뷰도 보지 않고 영화를 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기대했던 제임스 그레이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다른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다.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은 다리우스 콘지다. 영화를 볼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이후 제임스 그레이의 인터뷰를 보다 보니 얼마나 세심한 촬영이었나 깨닫게 됐다. 제임스 그레이가 '유령을 찍는 것 같은 느낌을 원한다'라고 했고, 둘은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다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잠자는 소녀'를 봤다. 둘은 인물이 조명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의 구도에서 영감을 얻었고, 그러한 조명과 인물의 배치가 인물에게 유령의 느낌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터뷰 내용을 알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영화의 인물들이 정말 유령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불편을 느끼는 지점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터뷰를 읽다가 인상적이다 생각한 말이다. 그는 진실은 우리가 불편을 느끼는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릎을 탁 쳤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모두 불편하고 금기시되고 부조리한 대상을 다뤘다. 박찬욱 영화의 근친상간, 봉준호 영화의 계층갈등, 홍상수 영화의 반복과 권태 등등...


개인의 시간을 역사의 시간으로 편입시키기

영화는 거의 제임스 그레이의 자서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그의 과거를 그대로 반영했다. (역시 뛰어난 영화감독은 비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하는 것인가...) 영화 속에서 주인공 폴은 사립학교 '포레스트 매너'에 입학한다. 입학 첫날 도널드 트럼프의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를 만나고, 그의 딸이자 도널드 트럼프의 누나인 메리앤 트럼프의 연설을 듣는다. 그런데 그게 실제 제임스 그레이의 경험담이라고 한다! 실제 그는 'Kew-Forest School'를 다녔고, 그 학교의 이사회에 프레드 트럼프가 있었고, 실제 졸업생 연사로 메리앤 트럼프가 연설을 했다. 하여간 그런 특별한 경험을 영화 속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과 엮어 역사의 시간으로 편입시킨 제임스 그레이의 능력에 감탄했다.


프로파간다?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는 프로파간다일까?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건 상관없지만, 한쪽의 입장을 선으로 규정하고 그에 맞서는 입장을 악으로 규정하여 그 둘의 대립에서 어느 쪽이 이기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지 관객이 고민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영화는 프로파간다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선과 선의 대립을 다뤄야지 선과 악의 대립을 다루면 프로파간다가 될 수 있다. (로버트 맥키 형님 가라사대)


예를 들어,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은 프로파간다이다. 산업화 시대 코리안 드림(선) vs 가난(악). 당연히 코리안 드림이 승리해야만 하고 결과적으로도 승리한다. 코리안 드림의 광채만 보여주고 그림자는 외면하여 승리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프로파간다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에 대한 가치판단은 안 하겠다. 추가로 나는 <국제시장>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많이는 아니고 찔끔.)


영화관을 나오면서 이 영화가 프로파간다 영화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프레드 트럼프와 메리앤 트럼프라는 실제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은 미국 내 백인이 가진 특권과 권력을 마음껏 누려야 한다고 주창한다.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될 때 주인공 폴의 엄마(앤 해서웨이 분)는 "핵전쟁이 터질 거야."라고 한다. 폴의 가족은 선이고 트럼프와 레이건은 악이다. 선과 악의 대립, 승리해야만 하는 쪽은 선, 이미 답이 정해진 게임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이 짧았다. 제임스 그레이는 두 대립항의 균형을 잘 유지했다. 폴의 가족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레이건이 주장하는 특권을 자신들도 누리고 싶어 한다. 유대인으로 살면서 누리지 못한 특권이 많아 스스로를 앵글로색슨 미국인들에 특권을 뺏긴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만, 흑인이 빼긴 권리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그들을 혐오 집단으로 대한다. 결정적으로 그들의 위선이 드러나는 장면은 아빠가 경찰에 잡힌 폴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차 안에서 나눈 대화 장면이다. 폴이 여전히 경찰서에 있는 그의 흑인 친구 조나단을 걱정하자, 아빠는 '나도 불공평한 일을 너무 싫어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고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한다. 유대인인 폴은 처벌받지 않고 흑인 고아인 조나단만 처벌받는 상황이 불공평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특권은 내려놓지 않겠다는, 레이건이나 트럼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얘기를 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폴의 가족은 티브이 앞에 모여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 소식을 듣는다. 장면이 끝나기 직전 폴의 외할머니는 '우리 손자들은 모든 특권을 누렸으면 좋겠다.'라는 결정적 대사를 날린다. 폴의 가족은 절대선에서 멀어졌고, 결과적으로 영화는 프로파간다에서 멀어졌다.


마무리

내가 좋아하는 제임스 그레이 영화는 <투 러버스>, <이민자>, <애드 아스트라>다. 이 세 편이 그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한 차원 높은 영화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아마겟돈 타임>은? 저 세 편 사이에 낄 작품은 아니다. 그레이 형의 '쉬어가는 타임' 정도가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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