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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프디 Apr 10. 2021

홍상수 <도망친 여자> 말의 불완전성과 카메라 패닝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읽기 전 참고해주세요.


홍상수 영화의 특징은 강조점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의 영화를 만들 때 하나의 주제와 하나의 중심 사건, 하나의 제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데, 홍상수의 영화는 그런 중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많은 관객들이 그런 홍상수 영화의 특징 때문에 갈피를 못 잡는 경우가 많다. 아직 개봉하지 않은 <인트로덕션>을 포함한 25편의 홍상수의 장편영화 중 나는 21편을 보았다. 그중 보고 나서 갈피를 못 잡고 붕 뜬 경우는 꽤나 많았다. 그럴 때면 '이 영화는 무려 홍상수 영화야'라는 생각을 하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그건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평론을 읽고 감독의 인터뷰를 보며 나름대로 영화를 흡수하려고 노력한다. 이번 2019년작 <도망친 여자>을 보고서도 갈피를 못 잡았다. 아마 나와 같은 관객들이 꽤 될 거라 생각한다. 이 글은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다른 사람들의 평론도 마구잡이로 읽어보고 감독의 인터뷰도 보고 무엇보다도 내 머리를 쥐어뜯으며 쓴 글이다. 부디 이 글이 여러분과 나의 대화의 시작이 되기를.


우선 '말과 진심'이라는 아이디어에 집중하여 글을 적어볼까 한다. 1장(감희와 영순의 만남)에서 영순의 대사를 살펴보자. 첫 장면, 밭을 가꾸던 영순은 아침 일찍 외출하는 옆집 여자와 만난다. '얼굴이 많이 부었다'는 옆집 여자의 말에 영순은 '그렇네, 많이 부었네'라고 한다. '오늘 면접이 있는데 얼굴이 많이 부어서 걱정이다'라는 옆집 여자의 다음 말에 영순은 '아냐, 별로 안 부었어'라고 위로한다. 고작 몇 초를 사이에 두고 영순은 상반된 말을 한다. 이런 말 뒤집기는 뒤에서 한 번 더 나온다. 감희가 영순의 집에 도착하고 영순은 CCTV로 감희를 발견하고 집 밖으로 나온다. 머리를 짧게 자른 감희를 보며 영순은 '정신 나간 고등학생 같아'라고 한다. 감희가 수줍어하며 정말 그러냐고 묻자 영순은 '아냐, 귀여워, 어려 보여'라고 한다.


둘 중 무엇이 진심일까? 일반적인 통념을 기준으로 보면 둘 중 하나는 거짓이고 다른 하나가 진심이어야 한다. 하지만 홍상수 영화가 의례 그러하듯, 영화는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어느 게 진심이라 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영순 자신도 어떤 게 자신의 진심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둘 다 진심일 수도 있고 둘 다 거짓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말의 가벼움과 불완전성이라는 이 영화의 아이디어이다.


말을 뒤집는 영순과 달리 감희는 같은 대사를 무려 세 번 반복한다. 바로 자신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다. 디테일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세 번의 대사의 주요 내용만 옮겨 적어보자면 대략 이러하다. '한 번도 남편이랑 떨어져서 지낸 적이 없다. 남편의 생각이 그러하다. 사랑하면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남편이 출장을 가서 처음으로 떨어져 본 것이다. 계속 붙어 지냈지만 한 번도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비슷한 대사를 거듭하는 감희의 태도에도 변화가 없다. 말 그대로 비슷한 대사를 비슷하게 반복한 것이다.


한편, 감희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정선생을 싫어한다. 우진도 그러하다. 우진은 정선생이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매번 진심인 척한다'라고 하고 감희는 정선생에게 '그렇게 말을 많이 하면 다 날아가버릴 것 같다'라고 한다. 결국 두 사람 다 말을 많이 하는 걸 경계한다. 그 안에 진심이 담겨 있느냐 아니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는 감희의 말에는 진심이 있는가? 그도 말을 많이 해서 '다 날아가 버리지'는 않았는가? 하지만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감희의 모든 대사를 통틀어서 거짓이라고 느껴지는 대사는 하나도 없다. 김병규 평론가의 씨네21 평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투명한 평면'만 있다. 반면 정선생을 비롯한 남자들 즉, 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말라고 하는 옆집 남자와 수영의 집에 찾아오는 젊은 시인의 말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말이 투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패닝에 그 답이 있다고 봤다. 이 영화에서 패닝은 여자들 간의 대화 장면에서 등장한다. 패닝으로 말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진심을 전달하려 한다. 반면, 남자들과의 대화에는 패닝이 없다. 전경에 남자를 후경에 여자를 배치하여 Z축을 따라 말이 오간다. 그 대화에서 진심은 느껴지지 않는다.


패닝이 등장하는 장면이 대화 장면 말고도 또 있다. 바로 영화관 장면이다. 처음 영화를 보는 장면은 스크린에서 시작한다. 쌍방향으로 파도치는 바다의 모습이 영사되고 있는 스크린이 나오고 잠시 후 그 위로 감희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카메라가 패닝하여 맨 앞 간이 좌석에서 영화를 감상 중인 외국인 남자 관객을 보여주고 다시 패닝하여 좌석에 앉아 있는 감희를 보여준다. 두 번째로 영화를 볼 때에는 영화관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는 감희를 보여주고, 패닝하여 바다가 출렁이는 스크린을 보여준다. 이제껏 영화는 패닝으로 인물 간 진심을 전달했다. 영화관 장면에서는 영화와 인물 사이에서 패닝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다. 나는 그 무언가가 영화라고 이해했다.


이 두 영화관 장면은 홍상수의 영화(에 대한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 같다. 스크린에서 관객으로 영화가 한 번 이동하고, 관객에서 스크린으로 영화가 또 한 번 이동한다. 그 후 영화는 흑백에서 컬러로 바뀐다. 그 흑백에서 컬러로의 전환을 영화의 의미가 풍성해졌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홍상수가 여러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그는 영화를 만들기 전 어떤 것도(소재, 가치, 인물, 감정, 스타일 등) 확실하게 정하지 않고 촬영을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어가면서 여러 디테일들을 모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 덩어리를 관객은 다시 디테일로 풀어헤치고 자신만의 감상을 집어넣어 마음속에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낸다. 많은 영화들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홍상수의 영화는 그런 특징이 강하다. 기자나 관객들이 홍상수의 영화에 등장하는 특이한 소재(이번 영화와 전작 <강변호텔>의 경우는 고양이)나 대사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항상 '그걸 특정하고 싶지는 않다. 관객마다 감상을 다르게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말한다. 이제 러닝타임이 다 됐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속에서 영화는 이제 시작된 겁니다. 당신의 영화를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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