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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훈 Apr 07. 2020

한 시절의 끝

#로마의휴일

젤라토 아이스크림과 커피와 담배, 진실의 입, 스쿠터 드라이빙과 선상 파티.


윌리엄 와일더의 [로마의 휴일]은 제목에 어울리는 낭만으로 가득한 영화다. 유럽 순방 도중 자유를 꿈꾸며 대사관에서 도망쳐 나온 공주와 그를 취재해 특종을 잡으려는 신문기자가 아름다운 도시 로마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다. 이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그들을 연기한 배우가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라면 더욱 그렇다. 화면에 담긴 거의 모든 장면이 휴양지처럼 풍족하고, 여유가 흐른다.



그러나 휴일은 영원할 수 없는 법이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주인공 '앤' 공주는 자신이 언제까지고 로마의 정체모를 아가씨로 남을 수 없음을 자각한다. 앤은 막중한 책임이 따르던 공주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신분을 숨기고 공주의 곁에서 그를 취재하던 신문기자 '조'는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앤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붙잡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안다.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 시기와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이때를 통과하면 다시는 어제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로마의 휴일]은 그런 순간이 온 사람들에 관한 영화다. 앤과 조는 더 이상 철부지 공주와 엉터리 기자가 아니다. 대사관으로 돌아온 앤 공주는 비서 또는 유모 역할을 하던 신하들의 타박을 단호히 물리친다. 그리고 전에 볼 수 없었던 위엄으로 왕족의 의무에 충실할 것을 선언한다. 한편, 앤을 떠나보낸 조는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는 사진기자인 친구가 몰래 촬영한 공주의 사진들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특종을 가져오겠노라 큰소리를 쳤던 조는 앤과의 우정을 배신하느니 편집장의 조롱거리가 되기를 택한다.


[로마의 휴일]의 진짜 아름다움은 휴일이 끝나는 순간에 있다. 이때의 아름다움은 그저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조금은 슬픈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기자회견장에서, 앤과 조는 공주와 기자로 재회하게 된다. 둘은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암시가 있지만 그뿐이다. 약속된 시간이 끝나고 앤 공주는 퇴장한다. 모든 기자들이 해산할 때까지 조는 그곳에 남아있는다. 텅 빈 홀에서 조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린다. 이미 사라진 공주와 조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조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남기고 뒤를 돌아보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다. 그는 다시 몸을 돌리고 화면 밖으로 퇴장한다. 이제 정말로 한 시절이 끝난 것이다.



20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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