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기울이면
[귀를 기울이면]은 주인공 ‘시즈쿠’에게 찾아온 작은 미스터리에서 출발한다. 시즈쿠는 고교 입시를 준비하면서도 따로 목표한 독서량을 채워나갈 만큼 책을 좋아하는 중학생이다(그녀는 주로 소설을 읽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시즈쿠는 자신이 도서관에서 빌려온 모든 책의 대여 카드마다 적혀있는 ‘아마사와 세이지’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언제나 자신보다 앞서 책을 읽고 있는 아마사와 세이지라는 존재는 곧 독서 애호가 시즈쿠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떤 사람일까? 멋있는 사람일까?
사실 이 수수께끼의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다. 영화 초반 시즈쿠의 일상과 관심사를 보여주는 몇 개의 장면이 지나면, 미지의 남학생 하나가 시즈쿠 앞에 나타난다. 대뜸 시즈쿠의 심기를 긁어놓고 사라지는 이 남자아이를 유력한 아마사와 세이지 후보로 지목하는 것은 관객 입장에서 합당한 일일 것이다. 시즈쿠의 상황도 비슷하다. 몇 번의 조우와 사건을 거치면서, 시즈쿠는 은연중에 상상 속의 아마사와 세이지와 남자아이를 겹쳐본다. ‘멋진 독서가 아마사와 세이지’와 ‘기분 나쁜 그 녀석’이 같은 사람 일리 없다며 곧 부정하지만.
어렵지 않은 만큼 오래가지도 않는다. 마주칠 때마다 티격태격하던 시즈쿠와 ‘그 녀석’은 시즈쿠가 발견한 특별한 골동품 가게에서 처음 긴 대화를 나눈다(이곳은 남자아이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이기도 하다). 시즈쿠는 평범한 또래인 줄 알았던 남자아이가 실은 바이올린 장인을 꿈꾸는 도제였고, 동시에 능숙한 연주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덧 할아버지의 밴드까지 합세해 즉석 공연을 펼치는 귀여운 장면이 지난 뒤, 할아버지의 입을 통해 남자아이의 이름이 처음 불려진다. 아마사와 세이지.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로 보였던 [귀를 기울이면]은 이때부터 동시에 인상적인 성장 드라마가 된다. 꿈을 향해 전진하는 세이지의 모습에 감화된 시즈쿠는 자신만의 목표를 세운다. 시즈쿠는 골동품 가게에서 본 '바론 남작' 인형을 주인공 삼아 첫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시즈쿠의 소설은 일상적인 묘사가 주를 이뤘던 [귀를 기울이면]의 다른 장면들과 대비를 이루며 풍성한 그림을 만들어낸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소설의 도입 부분인데, "먼 것은 크게, 가까운 것은 작게 보이는 것뿐이야."라는 바론 남작의 대사는 시즈쿠와 세이지의 관계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록 지금은 세이지가 크고 멀리 있는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이 본인이 만든 이미지임을 시즈쿠도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이야기의 출발점이었던 "아마사와 세이지는 누구일까?"라는 수수께끼는 이렇게 뒤집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사와 세이지는 어떻게, 그리고 왜 시즈쿠보다 먼저 모든 책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것일까?" 시즈쿠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 질문의 해답은 세이지를 통해 밝혀지는데, 거기엔 이런 속마음이 담겨있다. 나도 오래전부터 널 궁금해왔다고. 네가 나의 이름을 알기까지, 내가 너에게 이름이라도 전하기 위해 애썼던 시간이 있었다고. 아마 세이지의 입장에선 시즈쿠 역시 큰 존재였을 것이다. [귀를 기울이면]은 멀리서 서로를 커다랗게 보던 두 아이가 거리를 좁혀가며 마침내 비슷해지기까지의 이야기인 셈이다.
2020. 05.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