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인생 #사랑의블랙홀 #스누피더피너츠무비
연말엔 마음씨가 착한 영화에 눈이 간다. 한해를 정리하고 더 나은 새해를 희망하는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매사 낙관에 기대는 태도는 위험하다지만, 가끔은 선량함을 믿어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겨울에 관한 영화라면 더 좋다. 실제 나의 계절과 겹치는 영화는 더 가깝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겨울 영화에 으레 등장하는 소복이 쌓인 눈의 이미지는 (때로는 혹독한 고난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해준다.
내가 좋아하는, 선량한 겨울 영화 중 세 편을 꼽아봤다. 쉬고 싶을 때 찾는 휴가 같은 영화들.
멋진 인생 It's a Wonderful Life
프랭크 카프라 / 1946
[멋진 인생]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평생을 남을 배려하며 살아온 주인공 '조지'(제임스 스튜어트)가 그에 대한 보답은커녕 거대한 실패를 맞이하며 절망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는 곧 조지의 수호천사가 나타나 '조지가 태어나지 않은 세상'을 그에게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조지의 헌신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이 시퀀스는 조지가 다시 삶에 애착을 갖게 하고, 그간 쌓아온 선행을 돌려받는 결말로 이끈다. 스크루지 우화의 낙관적인 버전처럼 보이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믿음은 단순하지만 힘이 세다.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해롤드 래미스 / 1993
애처로운 염세주의와 얄밉지 않은 무례함. 배우 빌 머레이의 대표 이미지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연기한 [사랑의 블랙홀] 주인공 '필'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일에 무신경한 기상 캐스터 필은 겨울 축제를 취재하기 위해 도착한 소도시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살게 된다. 무슨 일을 해도 같은 날 아침으로 되돌아오는 무한 루프는 처음엔 축제였지만 결국 지독한 고통이 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한 필은 결국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시작한다.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의 가장 큰 공신은 애처로운 염세주의자, 빌 머레이의 페르소나이다.
스누피: 더 피너츠 무비 The Peanuts Movie
스티브 마티노 / 2015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2009년 개봉한 [꼬마 니콜라]를 두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영화'라 말했다. 나에겐 이 영화가 그렇다. [스누피: 더 피너츠 무비]의 주인공 '찰리 브라운'은 매사에 실패하는 아이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연날리기에 실패하고, 야구에 실패하고,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관심을 끄는 데에도 실패한다. 그러나 실패를 계속한다는 것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음엔 꼭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과 정직함을 유지하는 태도는 결국 찰리에게 합당한 보상을 준다. 개별 영화로서의 힘은 조금 약하지만, 원작자 찰스 슐츠의 귀여운 그림과 기억에 남을만한 문장들을 잘 계승한 안정적인 애니메이션이다.
- 2020.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