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낭만주의
들어가며
음악사에서 후기 낭만주의 시대는 대략적으로 1890년에서 1910년 사이의 시기이며, 초기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인 슈베르트, 슈만, 쇼팽, 멘델스존의 음악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특징으로는 곡의 길이가 예전보다 훨씬 길어졌으며 오케스트라의 규모 역시 상당히 확대되었다. 또한 기존의 조성체계가 조금씩 붕괴되는등 진보적인 화성어법 등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특징은 근.현대 음악의 시작을 암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말러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인 말러 (Gustav Mahler)는 어린시절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으며,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음악, 역사,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유럽의 여러 대도시에서 지휘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37세부터는 빈 오페라의 감독직을 맡아 10년동안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말러의 초기 작품에는 교향곡 작품안에 노래를 도입한 작품들이 많은데 독창, 어린이 합창, 혼성 합창 및 관현악 반주를 위한 <탄식의 노래>와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에 의한 노래> 등이 대표적인 그의 초기 작품들이다. 또한 작품의 길이가 상당히 긴 편이며 오케스트라의 규모 역시 상당히 확대되었다. 초기 작품에서는 제목이 붙은 표제작품을 선호했던 반면, 말러의 중기 이후의 작품은 제목이 따로 붙지는 않았으며 웅장한 면모를 보이면서도 말러가 생전에 겪었던 복잡한 내면으로부터 비롯된 삶의 갈등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말러는 교향곡 9번을 기존의 작곡가들이 (예를 들어 베토벤, 브루크너, 드보르작 같은) 9개의 교향곡을 작곡하면 죽는다는 징크스 때문에 <대지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였다. <대지의 노래>는 큰딸 안나의 죽음과 부인의 배신, 그리고 자신의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심경을 반영하였으며 젊음과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하기 위해 한스 베트게가 독일어로 번역한 <중국의 피리> 시집 가사에 기초한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동양적인 정취를 나타내기 위해 5음음계가 자주 등장하며 이국적인 음색과 저음역대의 악기들을 주로 배치함으로써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https://www.youtube.com/watch?v=fE-1BW9OI8c
슈트라우스
독일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는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고 대학에서 미술사와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 재능은 매우 뛰어났으며, 6세부터 작곡을 하였으며 한스 폰 뷜로우에게 지휘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의 오페라 <살로메>와 <엘렉트라>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반음계 진행과 화성 어법이 특징적이며, 무조성의 시작을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기존 조성음악의 기능 화성 보다는 화성의 색채적인 면을 강조하였으며 불협화음의 해결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는등 근대적인 음악 어법을 선호하였다. 또한 악구 구조 역시 불분명해졌으며 길이가 확장되었고 서사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슈트라우스는 그의 음악 작품에서 다양한 장르의 문학 작품들을 소재로 채택하였는데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기초한 <맥베스>, 니체의 작품에 기초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주제로한 <돈키호테>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한편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은 슈트라우스가 기존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확고한 음악적 정체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독일의 희대의 사기꾼인 틸 오일렌슈피겔의 행적을 묘사하고 있다. 틸 오일렌슈피겔의 익살스러우면서도 고약한 성격을 바이올린과 호른 선율로 표현하고 있으며, 마치 바그너의 유도동기처럼 틸 오일렌슈피겔의 동기가 지속적으로 곡에 계속 등장한다. 곡의 형식은 (1) 틸의 소개 (2) 틸의 장난 (3) 틸의 재판 (4) 선고와 형 집행 (5) 에필로그 이렇게 다섯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79XrCDogp0
말러와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후기 낭만시대를 대표하는 이 두 작곡가들은 선의의 경쟁자이면서도 서로의 성격이 너무 달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순간이 많았다고 한다. 외향적이고 놀기 좋아하는 슈트라우스와는 달리 사색적이고 침묵을 선호하는 말러는 서로의 의도와 행동을 자주 오해하였고 본의아니게 상처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공연이 있던날 말러는 슈트라우스의 공연에 가서 축하해 주기도 하였으며, 말러가 죽자 슈트라우스는 충격이 너무 커 여러날동안 말을 하지 못했고 말러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베를린에서 말러의 교향곡 3번을 지휘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