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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운서 Jul 28. 2022

있잖아, 있잖아.

사소한 대화의 힘



바다가 보이는 제주의 한 카페에 앉아서 창밖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옆 자리에 앉아있던 한 커플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꽤나 생각에 잠겨 있었구나. 옆 테이블에 누가 있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네.'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눈치를 채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 커플은 단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고 있었으니까. 


여자는 노트북으로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고 남자는 닌텐도 스위치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서울의 한 카페였다면 그 모습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제주도민이어서 이곳이 일상의 공간이라면 역시 끄덕거렸겠다. 그런데 그들의 복장은 누가 봐도 '우리 여행 왔어요.'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커다란 캐리어마저 옆에 놓여 있었다. 제주까지 커플이 함께 여행을 와서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한 명은 영화를, 한 명은 게임을 하고 있는 상황. 


영화를 같이 보거나, 게임을 같이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함께 본 영화를 가지고도 대화를 또 나눌 수 있었을 거고, 게임을 하면서 귀엽게 투닥투닥 사랑싸움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쉽게 판단하면 안 되지만 이 커플의 미래가 조금은 보이는 듯했다. 'We have to talk'라는 제목으로, 대화가 없어지면서 사랑의 배터리가 점차 방전되어 가는 레드룸 전시회의 작품들도 떠올랐고. 


그러던 중 어제 통화로 나눴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있잖아, 있잖아."하면서 끊임없이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쏟아내던. 일상 가운데 있던 크고 작은 일들을, 그때 했던 생각들을, 심지어 계단을 올라가는데 난간이 없어서 무서웠다는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까지 나눠 주던.


그러면서도 "이런 사소한 이야기들 다하면 들으면서 재미없거나 지루할 수도 있잖아."라는 걱정을 하기에 그게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인지 말해줬다. 일상의 작은 부분까지도 대화를 나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알기에. 그리고 그런 대화들이 사라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역시 잘 알기에.


어떤 것이든 '양'보다 '질'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사람이지만, 대화만큼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이상의 양이 전제가 되어야 대화의 질까지 성취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저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그 대화를 반드시 '좋은 대화'라고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반대로 '좋은 대화'였다면 분명 어느 이상의 대화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화의 양을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나의 일상에서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나눠주는 거겠지. 


그러니까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그 어떤 관계든 우리의 대화가 풍성하면 좋겠다. "있잖아, 있잖아."하면서 극히 사소한 부분까지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작은 이야기를 듣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도 모두가 알면 좋겠다. 하루하루 방전되기 일쑤인 우리의 일상을 그러한 대화가 넘치게 충전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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