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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덕 Jan 26. 2020

올해는, 더 느슨해지자

목욕탕에서의 새해 다짐



온천에 갔다. 몸을 씻고 탕에 자리를 잡았다. 명절 전날이라 사람들은 가득했고, 나는 평소보다 다소곳하게 몸을 구겼다. 찌르르 한기가 돌다가 이내 온기가 몸을 채웠다. 나는 ‘뜨겁다’ 따위의 감각을 느끼다가, 앞에 앉은 사람을 흘끔 쳐다보다 문신을 보고서 눈을 깔다가, 물 튀기는 꼬마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차다가, 별별 잡생각을 하다가 심심할 때쯤, 낯선 감각을 몸으로 느낀다.


찰랑.


파도다. 욕탕 물에도 파도가 친다. 바다 파도만은 못하지만, 파문이라기엔 제법 기세가 있어 파도라고 치자. 보글보글 아래에서 올라온 파도는 나에게 다가와 찰랑. 하고 부딪친다. 찰랑.은 그다음 찰랑.과 이어져 찰랑찰랑.이 되었다가 찰랑찰랑찰랑.이 되고 찰랑찰랑찰랑찰랑.이 된다.


욕탕의 파도는 밖에서 나에게 오는 것이지만, 내 안에서 밖으로 가는 것이기도 하다. 뜨거운 탕에서 굳은 마음이 느슨해져 찰랑.하고 움직인다. 격하게 들끓던 감정이 찰랑. 하고 가벼워진다. 나라는 껍데기를 사이에 두고, 안팎으로 물과 마음이 찰랑댄다. 밖의 리듬에 호응하여 안의 리듬도 안온해진다.



내가 간 목욕탕은 포천 일동의 제일유황온천이었다. 처음 그곳에 들어갔을 때의 희열을 나는 기억한다. 지은 지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촌스러운 외관부터 마음이 동했다. (나는 태생적으로 쭈구리라 으리으리한 강남 빌딩 사이에 있으면 황송하여 긴장하곤 한다) 출입구에 들어서니 뽕짝 가락이 울려 퍼졌고, 십전대보탕과 구기자차를 파는 매점에선 한약 냄새가 났다.

탈의실에는 살가죽이 쳐진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머지는 근처의 앳된 군인이나 문신을 한 지역 어깨들이었다. 어느 쪽이든 나와는 접점이 없었다. 더 마음에 들었다. 접점 없이 그냥 혼자일 수 있는 곳이었다.

샤워타월을 챙겨 문을 여는 순간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곳은 진짜다!  진짜 천연온천이라는 확신이 왔다. 계란 썩는 듯한 냄새를 인위적으로 안배할리 없다. 과연 물은 좋았고 피부는 미끈해졌다.


이후로 나는 그곳의 단골이 되었다. 몸과 마음에 더께가 앉아 단단히 굳은 것처럼 느껴질 적이면, 포천으로 찾아가 때를 밀고 인공폭포를 맞았다. 그러고 나면, 견딜만할 정도로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제는 탕을 나오며 유난히 마음이 느슨했다. 찰랑찰랑을 흠뻑 느껴서 그랬으리라. 딴짓을 할 여유가 생겨, 나오는 길에 십전대보탕을 주문해보았다.



난생처음 마셔보는 음료다. 2000원을 내자 아주머니가 보온포트에서 음료를 내려 종이컵에 담아주었다. 많이 쓸 거라며, 생강정과를 몇 조각 같이 주었다.

한 모금 마시니, 매우 썼다. 버릴까 싶었지만, 매점 아주머니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노인 취향의 음료를 젊은 총각이 마시고 있으니 구경하고 있었으리라. 아니면 그저 심심했으리라.


나는 홀짝홀짝 마시는 척하며 주위를 구경했다. 미스터트롯을 보는 옆쪽의 어르신들을 보다가, 핸드폰을 보는 카운터 직원을 보다가, 손자를 보는 할머니를 본다. 그저 멍하니 본다.

눈은 그저 아무 곳이나 향하고 있고, 머릿속은 계속 찰랑찰랑거리다가, 문득 깨닫는다. 올해 나의 목표가 정해졌다는 것을. 한 해의 지표가 될만한 무언가를 나는 온천에서 발견했다.


바로, 찰랑. 이다.


올해 나의 일 년 계획은 온천물처럼 느슨하게 찰랑거리기이다.

사람들 앞에서 잔뜩 굳어 바른 말만 할 게 아니라,

일이든 관계든 힘주어서 잘하려고만 할 게 아니라,

물티슈와 담배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항상 살피는 게 아니라,

틈 나면 핸드폰으로 계속 틈을 메꾸는 게 아니라,

너무 격하지도 너무 단단하지도 않게.

대충. 보다는 조금 열심히.

유연하게. 보다는 조금 더 나른하게.

책임을 다하지만  이상은 아니도록.

온탕처럼 편안한 흐름으로.

누구를 대하듯 흔들리지 않고 내 리듬대로 찰랑.


오늘의 느슨한 마음을 올해 내내 간직해보자고 다짐한다. 아니, 다짐이란 말도 너무 단단한 것 같다. 더 느슨하게 새해 소망 정도로 해둔다. 그저 평소보다 자주 제일온천을 찾아오자고 생각한다.

마음이 굳어서 괴로울 때 찾아오는 게 아니라, 생각 없이 멍하니 가서, 주기적으로 찰랑을 충전하고 오자고. 내 뒤에는 포천일동제일유황온천이 있으니, 걱정말고 일상에서 더 느슨해져보자고. 올해의 나에게 엊그제의 내가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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