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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덕 Apr 06. 2020

아이유의 숨소리

<시간의 바깥>이 준 위로.


  차를 타고 움직이다 보면, 세상에 나만 존재하는 듯한 순간이 온다. 보통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러하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길, 브레이크와 악셀을 밟고 눈은 앞을 보지만, 그저 멍하여 무엇 하나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들어서고 조금 시간이 흐르면, 노래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볼륨을 키우지 않아도 카오디오의 노랫소리가 커진다. 작은 드럼 소리 하나도 콕콕 귀에 박힌다. 세상에 나와 노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순간이다.


  엊그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듣던 노래는 아이유의 <시간의 바깥>이었다. 그날에는 아이유의 숨소리가 유독 또렷하게 들렸다. 


  서로를 닮아 기울어진 삶 

  흐읍 소원을 담아 차오르는 달 

  흡 하려다 만 괄호 속의 말 

   이제야  음 음 음


  빠르게 이어지는 노래와 노래 사이에 흐읍, 하고 아이유는 숨을 들이마신다. 가녀린 호흡을 디딤돌 삼아 노래는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숨을 들이마신 만큼 숨은 흘러나오고, 흘러나오는 숨에 노래는 담긴다. 나는 그녀의 들숨 날숨이 바다수영처럼 느껴졌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위태롭게 나아가는 행위. 고개를 내밀어 숨을 마시고, 고개를 숙여 숨을 내뱉으며 수면 아래의 세계를 보는 행위. 아이유의 아름다운 노래가 바닷속 세계이려나. 들숨은 노래를 살려서 노래를 나아가게 하고 노래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끈다.

  아이유의 들숨이 들리고 나니, 날숨도 들려왔다. 아이유가 ‘숨이 차게 춤을 추겠어’라며 나직이 노래를 내려놓으면, ‘추겠어’‘어’에서 침묵까지 ‘어어어ㅓㅓㅓㅇㅇ’로 소리가 떨리며 흩어진다. 숨에 담긴 노래는, 숨이 옅어지며 제 힘을 잃고 희미해진다. 바스러지는 이응 소리에 나는 어쩔 줄을 모른다. 파도가 돌에 부딪치고 난 뒤, 쏴아아 하고 허물어지며 내는 소리 같다. 들숨이 살아나는 소리라면 날숨은 죽어가는 소리다. 날숨의 허무함에는 약간의 관능이 녹아 있다.


  한 번 숨이 들리기 시작하니, 노래마다 숨소리 먼저 들린다. 요조가 ‘눈부신 하늘에 커피라도 붓자, 당장 생기 도는 밤을 보고 싶어’라고 노래할 때, 툭 내려놓듯이 ‘싶어’를 읊조리면 ‘어어ㅓㅓㅓ’하고 허망하게 흩어지는 숨. 장필순이 흐읍 진주홍빛  구름들로  덮여버린 하늘과 바다 흐으읍 믿을 수 없이 컸던  붉은 태양이  잠기던’하고 노래 부를 때의 자연스럽고 깊은숨. 요조나 장필순에 비하자면 아이유의 숨은 조금 더 간절하다. 더 애써서 힘을 모으는 것만 같다. 그래서 더 여리게 느껴진다. (나는 음악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을 늘어놓고 주관적인 느낌으로 비교할 뿐이다) 


  운전을 하며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을 때, 노래가 나를 위로하는 까닭은 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위로는 한밤중에 악몽을 꾸다 깨었을 때와 닮았다. 지독하게 무서운 꿈에서 벗어났는데, 눈앞은 캄캄하고 나는 여전히 혼자인 것만 같아 두려움이 밀려올 때, 어둠에 눌려서 뭉개질 것만 같을 때, 곁에서 자고 있는 누군가의 쌔근쌔근 숨소리,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내 손 닿을 곳에 살아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감각. 그처럼 누군가의 숨은 내가 세상에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한다.

  아이유의 노래가 그러했다.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애쓰는 호흡으로,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숨소리가 있다는 것은 숨에 의지하여 나아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나도 그러하다는 것. 들숨과 날숨의 균형으로 나는 살아가고, 아이유는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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