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Mr.Children '쿠루미'": 다시 보자

서브타이틀의 정수

by 꼬불이

"Mr.Children '쿠루미'": 멈춰버린 시간을 걷는 남자


maxresdefault.jpg


미스터 칠드런(Mr.Children)의 '쿠루미(くるみ)' 뮤직비디오를 백 번은 봤을 거다.


단순히 노래가 좋아서만은 아니다. 이 5분 남짓한 영상 속에는 이야기를 짓는 사람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서브텍스트(Subtext)'의 정수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아저씨들이 모여 'Mr. Adults'라는 밴드를 만들고, 서툴지만 뜨겁게 연주하다 결국 현실로 돌아간다는 이야기. 겉보기엔 그저 '중년의 잃어버린 꿈'에 대한 드라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를 꿈꾸는 학생들이라면, 혹은 이야기의 행간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표면적인 줄거리 너머에 숨겨진 장치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은 내가 이 영상을 볼 때마다 감탄하는, 그 치밀한 비극의 미장센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스크린샷 2025-12-05 오전 11.10.01.png


오프닝의 사슴, 박제된 시간의 은유


뮤직비디오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화면에 잡히는 것이 있다. 바로 '박제된 사슴'이다.


살아있는 듯 보이지만 생명을 잃은 채 멈춰버린 사슴. 왜 하필 감독은 첫 장면으로 이 박제된 동물을 보여주었을까?



그것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중년 남성의 현재 상태를 완벽하게 대변하는 상징이다. 그의 시간은 박제된 사슴처럼 어느 한 시점에 멈춰 있다. 겉으로는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숨을 쉬며 살아가지만, 그의 내면 속 행복과 시간은 이미 오래전 죽어버린 채 형체만 남아있다.


그 '박제된 시간'의 실체는 식사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스크린샷 2025-12-05 오전 11.11.36.png


50대의 남자와 눈 앞에 보이는 30대 아내...그리고 8살 정도의 딸


주인공이 어두운 부엌에서 혼자 끼니를 때우다 문득 앞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그의 시선 끝, 환영처럼 아내와 어린 딸이 웃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 장면을 단순히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 정도로 넘겨짚는다. 하지만 디테일을 파고드는 작가의 눈으로 본다면, 여기서 소름 끼치는 시간의 모순을 발견해야 한다.



주인공은 희끗한 머리에 깊은 주름이 패인 50대 중후반의 남성이다. 그런데 그가 보는 환영 속 아내는 여전히 30대이고, 딸아이는 고작 9살, 10살 남짓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산을 해야 한다. 보통 30대에 결혼을 한다면, 50대 가장의 딸은 이미 성인이 되었거나 최소한 고등학생이어야 한다. 아내 역시 그와 함께 나이 들어 중년의 모습이어야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 가족은 여전히 젊고, 여전히 어리다. 그것은 그들이 주인공 곁을 떠난 지 이미 10년, 아니 15년이 넘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단순한 이혼이나 별거라면, 아빠의 상상 속에서 딸은 성장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게 맞다. 하지만 딸이 10살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 그것은 두 사람이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는, 돌이킬 수 없는 사별(死別)을 의미한다.


Gemini_Generated_Image_1fqgn51fqgn51fqg.png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말하기 (Show, Don't Tell)


오프닝의 사슴처럼, 주인공의 행복은 15년 전 그 시절에 박제되어 있다.


그는 텅 빈 집에서 홀로 40대를 지나 50대가 되기까지, 매일 저녁 그 멈춰버린 시간과 마주하며 꾸역꾸역 밥을 넘겨왔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그가 뜬금없이 'Mr. Adults'라는 밴드에 합류하는 동기가 전혀 다르게 읽힌다. 그에게 밴드는 낭만적인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적막, 박제된 삶으로부터의 탈출이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가 세상에 내지르는 마지막 비명이다.



좋은 작품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15년 전에 가족을 잃고 외롭게 살았습니다"라는 대사 한마디 없이, 오직 '박제된 사슴' 과 '늙어버린 남자와 어린 딸' 이라는 시각적 모순만으로 한 인간의 인생 전체를 설명해 낸다.


이 뮤직 백 번 넘게 보면서도 매번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는, 바로 이 치밀하게 설계된 서브텍스트 때문이다.



오늘 밤, '쿠루미'를 다시 듣는다면 가사나 멜로디 이면에 숨겨진 이 묵직한 진실을 들여다보길 바란다. 멈춰버린 시간 속을 걷는 한 남자의 고독을 이해하는 순간, 이 노래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 당신에게 다가갈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