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본 광경이 자꾸 떠오른다. 한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서 있었다. 키가 작아 손잡이에 닿지도 않는 아이였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아이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지만, 엄마는 그 작은 손을 놓지 않았다.
"괜찮아, 엄마가 잡고 있어."
그 말 한마디가 왠지 가슴에 남았다. 세상은 아이에게 너무 크고, 손잡이는 여전히 너무 높지만, 누군가 그 손을 잡아주고 있다는 사실. 그게 언더독의 시작이자 끝이 아닐까?
언더독.
우리는 모두 언더독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은 우리보다 컸고, 규칙은 우리보다 먼저 만들어져 있었다.
록키는 30대 삼류 복서였고(록키), 매기는 32살에 복싱을 시작한 웨이트리스였다(밀리언달러 베이비)
예영효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 둘째 아들이었고, 진영인은 갱스터 아버지를 둔 경찰 지망생이었다.(무간도2)
모두 시작부터 불리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 가슴에 남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이겼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싸움 안에서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이다. 위대한 드라마는 '관계' 에서 비롯된다.
록키에겐 에이드리언과 미키가 있었다.
매기에겐 프랭키와 스크랩이 있었다.
혈연이 아니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코너에 서서 끝까지 함께했다. 이기든 지든, 일어서든 쓰러지든, 그 곁을 지켰다.
그게 가족이었다. 선택으로 만든 가족. 사랑으로 이어진 관계. 언더독의 이야기가 결국 '사랑 찾기와 가족 이루기' 로 귀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이 아무리 높은 손잡이를 만들어놔도, 누군가 내 손을 잡아준다면 우리는 버틸 수 있다. 버티는 걸 넘어서 싸울 수 있다.
이게 영원불멸한 '언더독' 스토리텔링의 핵심이다.
결핍에서 시작해 채움으로 나아가는 여정. 혼자였던 이가 함께가 되는 과정.
언더독은 단순히 약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립에서 연대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외로움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모든 인간의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태어날 때 언더독이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누군가의 코너에 서고, 누군가의 가족이 되면서 비로소 싸울 힘을 얻었다. 그래서 언더독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버스 안 작은 아이가 자라서, 언젠가 다른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그날까지. 이야기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