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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Mar 08. 2024

상복에 명찰을 달 걸 그랬어

1927년 2월 8일 태어난 할머니는 2024년 2월 26일까지 아흔일곱 해를 살았다. 스무 살에 결혼해 두 아들을 낳고 6.25 전쟁통에 피난길에 올랐다. 그리고 38선 이남에서 아들 넷을 더 낳았다. 당시 대다수 여인들이 그러했듯, 할머니는 이렇다 할 사회활동 없이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한 엄마이자 아내, 며느리, 시어머니로 살았다. 일찍이 셋째 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냈고, 남은 아들 다섯은 결혼해 모두 11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중 다섯이 결혼해 3명을 또 낳았다.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 손서, 손부, 증손까지 29명. 장례식장 안내 게시판에 유족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찼다. 자리가 모자라 손녀 일부와 증손들은 들어가지 못했다.     


평소 할머니는 조용하고 내향적이어서 인간관계가 넓지 않았다. 그저 같은 교회를 다니며 근방에 사는 이들이 할머니의 지인이었다. 어린 기억에 할머니가 한 일이라곤 밥 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나의 삼촌들에게 잔소리하는 것이었다. 너른 마당을 가꾸고 마당 한편에 사는 개와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할머니의 몫이었다. 치와와는 삼촌들의 친구였다. 어느 날, 눈이 툭 튀어나오고 빼짝 마른 치와와가 낑낑거리며 비실대자 할머니는 약장에서 소화제를 꺼내 치와와 입에 강제로 집어넣었다. 잠시 후, 그 녀석은 마당을 신나게 뛰었다. 할아버지부터 막내아들, 마당에 핀 나무와 꽃, 개까지 무엇 하나 할머니 손이 닿지 않는 건 없었다.     


출산율이 0.6명대로 떨어진 시대에 우리 할머니의 장례식 풍경은 낯설고도 살가웠다. 할머니 살아생전에도 동시에 모이지 못했던 우리는 할머니가 이 땅을 떠나자 전국 팔도에서 군말 없이 냉큼 모였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11년 만에 처음이었다. 작은 아빠들 머리는 희끗거렸고 한참 어린 사촌동생들은 모두 성인이 됐다. 당시 꼬맹이었던 나의 두 아들이자 할머니 증손자들은 키가 훌쩍 큰 청소년이 되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1년 전, 집안 결혼식에도 우리는 모였더랬다. 하지만 1시간 남짓 밥 먹고 헤어졌을 뿐. 장례식은 3일 내내 서로 끊임없이 마주치게 만들었다. 할머니 영정 사진 앞에서 누구라 할 것 없이 눈물을 쏟았다. 한참을 울고,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다가도,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다시 할머니를 추억했고 깊이 애도했다.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었다. 대놓고 울다가 웃어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은 신기한 곳이었다.


이틀에 걸쳐 400명의 조문객이 함께 슬픔을 나누고 우리를 위로했다. 한 여인의 일생을 기리고 애도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그 많은 사람이 찾아오다니. 할머니는 실로 위대했다. 생명을 잉태해 양육하는 일이 한 세대, 두 세대, 세 세대에 걸쳐 이뤄내는 광경을 한눈에 보는 건 경이로웠다. 그 자손들과 여러 모양으로 연결된 지인들이 단 한 번도 뵌 적 없는 할머니의 소천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이 어찌 놀랍지 않을 수 있을까.     


할머니의 대가족은 자연스럽게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켰다. 열 명 넘게 서 있는 우리를 조문객에게 소개하는 일은 길고 거창했다. 여긴 큰 형님, 형수님, 여긴 둘째 형님 내외, 큰 조카들, 여긴 막내 제수씨, 저긴 넷째 동생, 그 집 애들. 둘째 날 손님이 끝없이 이어지자 가족을 소개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빈소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수시로 바뀌니 소개하는 사람도 헷갈렸다. 중간에 서 있는 아들을 빼놓고 말하거나 동생 순서를 바꾸거나, 조카가 제수씨가 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가족 수가 세 명만 넘어가도 조문객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가 누군지 절대 기억할 리 없었다. 그렇다고 소개를 안 할 수도 없고. 엄숙해야할 빈소에 그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정말 대가족이시네요!" 상복 위에 명찰을 달아야 했나. 할머니가 우리에게 남겨준 재미있고 유쾌한 순간이었다.     


침통하고 쓸쓸할 법한 자리지만 다산의 축복을 누린 할머니 덕에 우린 슬픔에 압도되지 않고 3일 동안 가족여행을 온 듯, 장례 일정을 무탈하고 평안하게 치렀다. 언제 다시 이렇게 다 만날지 알 수 없었다. 장지에서 모든 절차를 마치고 헤어지기 전, 난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저희 다 같이 사진 한 장 찍을까요? 언제 또 이렇게 다 모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유난히 맑고 따뜻했던 날, 스무 명이 넘는 가족과 친히 장지까지 찾아온 지인들이 한 장의 사진 속에 박혔다. 몇 년 전엔 할머니가 가족들 한가운데 있었는데. '할머니, 천국에서 저희 다 보고 계시지요?' 할머니에게 우리가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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