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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Nov 01. 2024

결국 40년 만에 그들을 해치웠다

아무도 몰랐던 내 안의 비밀

사람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속사정이 있다. 이미 한 번 결혼하고 화려한 싱글로 돌아왔다거나, 배우자 몰래 진하게 사랑했던 과거 연인이 있다거나, 학교 다닐 때 전교 꼴찌였다거나. 내겐 꽁꽁 숨겨진 신체적 특징이 있다. 덧니다. 김치~ 치즈~ 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려 씩 웃을 때 드러나는 치아는 평범하나, 입을 벌린 채 고개를 30도만 치켜들면 앞니와 송곳니를 지나 작은 어금니 뒤에 숨은 이가 보인다. 길 안쪽 수풀 속에 가만히 웅크린 바위처럼 오른쪽과 왼쪽에 나란히, 공평하게 대칭을 이룬다.

    

정상적인 치아 안쪽으로 덧니가 두 개나 자리한다는 걸 안 이후, 만날 혀끝으로 덧니를 만지작거렸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어도 혀 가장자리로 느껴지는 이 두 개. 요상할새, 어찌 이 안에 이가 또 날꼬.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 덧니의 존재를 보고했을 때 엄마는 놀랐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 더는 말이 없었다. 아주 가끔씩, 덧니의 안부를 전하면 금시초문이라는 듯 엄마는 새롭게 또 놀랐다. 나의 덧니는 자주, 반복적으로 잊혔다.


비밀스러운 덧니는 미관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은 이상 아무도 은밀한 내 덧니를 알아채지 못했다. 다만 학창 시절, 쉬는 시간 책상에 엎드려 낮잠을 잘 때 자주 혀를 깨물었다. 정신이 몽롱한 채 일어나면 혓바닥이 얼얼했다. 전면에 배치되지 않고 방향을 틀어 후방에 숨어있던 덧니는 치아 위생에 적잖은 방해가 됐다. 양치질을 열심히 해도 자주 덧니와 어금니 사이 좁디좁은 틈으로 음식물이 남았다. 치실도 들어갈 수 없는 사각지대를 깨끗이 하기 위해 혀끝을 말아 드릴처럼 파고들었다. 둥그스름한 혀의 역할은 제한적이었고 어금니는 시나브로 썩어갔다.

  

덧니를 빼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십수 년 전 스케일링을 하다 들었다. 그건 치과의 권고일 뿐, 일상생활에 별 지장 없는데 일부러 돈 들여 고통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치과는 내게 기피시설이었다. 산부인과 못지않게 공포스럽고 불쾌한 곳. 이제껏 살면서 치과를 찾아간 건 열 번이 채 되지 않는다. 충치가 생기고 치통이 생겨야 참다못해 겨우 치과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왼쪽 덧니를 뺀 게 5년 전이다. 덧니를 제거하고 썩은 어금니에 신경치료를 하고, 크라운을 씌우기까지 1시간 넘게 꼼짝없이 누워 입을 벌린 채 난 영혼을 탈탈 털렸다. 오른쪽도 분명 충치로 고생할 때니 일주일 후에 다시 치과에 오라고 했다. 치료비도 할인해 주겠다고 했다. 여세를 몰아 지혜롭게 치과를 조금 더 들락거렸어야 했는데 내겐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의도적으로 오른쪽 덧니를 잊었다.


잊는다고 사라지면 좋으련만, 불필요하다 못해 건강에 해가 되는 그 녀석을 끌어안고 40년을 살았다. 치과 가는 게 무서워 버티고 또 버텼다. 몇 달 전부터 이가 시렸다. 급기야 며칠 전부터 오른쪽 잇몸이 쑤셨다. 올 것이 왔구나. 5년 만에 동네 치과를 찾아갔다. 덧니는 왕창 썩었고 작은 어금니도 썩었다. 그 옆 큰 어금니도 충치치료가 필요했다. 진작 뺐으면 공사가 이리 커지지 않았을 텐데 후회해야 무슨 소용인가. 수년 전 덧니를 들어내라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지난봄 어금니에 구멍이 났다는 진단을 애써 무시하고 미련하게 버텼다. 자업자득이다. 언젠가 벌어질 줄 알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결과다. 급하지 않아서 미루다가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았다.


하루하루 사느라 급급해서 진짜 중요한 걸 하지 않는다. 당장 숨 쉬고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어서 미루고 또 미룬다. '나중에 하면 되지. 큰 일 나겠어?' 그러다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원치 않게 큰 일, 까다로운 일, 복잡한 일로 바뀌어 부메랑처럼 돌아와 일상을 흔든다.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을 부지런히 해내는 인생은 격이 다르다. 미리미리 해 두면 중요한 일이 급한 일이 되지 않는다. 만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헐레벌떡 정신없이 살면 인생은 급한 일 처리하다 끝난다. 푼돈으로 해결될 일에 거금이 뭉텅 나간다. 반백살 가까운 시간, 덧니 두 개를 안쪽에 숨겨둔 채 살았다. 불편한 줄 모르고 불편하게 살았다. 앓던 이를 빼서 속이 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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