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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May 24. 2024

남편은 롯데, 아들은 두산, 나는 치킨

야구, 그놈의 야구

나는 야구가 싫다. 9회말까지 기본 3시간이 넘어간다. 축구는 전후반 90분 , 하프타임 15분에 연장까지 가도 2시간 안팎이다. 농구는 1쿼터에 10분씩 4쿼터면 40분이다. 파울로 끊어지고 작전 타임, 자유투로 소비되는 시간이 있어도 2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이놈의 야구는 그날 경기에 따라 한도 끝도 없이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경기가 길어지면 관객은 힘들다. 야구 룰을 잘 모르는 관객은 더 힘들다. 롯데 자이언츠의 피를 받은 남편은 아이들에게 일찍이 야구를 가르쳤다. 그 옆에서 나도 사과 깎으면서, 과자 먹으면서 같이 들었는데 여전히  안타와 홈런, 아웃 정도만 안다. 야구는 윷놀이와 달라서 타자가 출루하면 1루에 있던 선수는 2루로 뛰어야 한다는 것, 볼넷이면 타자는 1루로 진출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물론 오래 전부터 볼과 스크라이크를 구분하고 직구와 변화구를 알아채는 아이들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같이 경기를 보다가 궁금해서 물어보면 아이들은 꼼꼼히 알려준다.


야구 응원팀은 주로 아버지, 그의 아버지인 할아버지 영향을 받는다. 특히 '부산 갈매기' 롯데는 핏줄과 같아서 제멋대로 바꿀 수 없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남편은 MBC청룡(LG트윈스 전신)을 마음에 품었다. TV로 야구 경기를 보며 응원하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불렀단다. "니 아부지 고향이 어디고? 어디 보리 문둥이가 서울 팀을 응원하노?" 호통치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5000원을 건넸다. "가서 롯데 어린이 회원에 가입해라."


3대에 걸쳐 롯데 팬인 우리 집에 파란이 일어났으니, 둘째가 일곱살 때였다. 그날 잠실에서 롯데 대 두산 경기가 있었는데 두산이 이겼다. 야구장을 나서는 길, 용감한 둘째는 아빠의 손을 지긋이 잡고 말했다. "아빠, 저 이제 두산 팬 할래요." 패배의 슬픔보다 더 큰 충격에 말을 잃은 남편은 어릴 적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아픔을 기억하고 둘째에게 바로 두산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사줬다. 큰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둘째에게 말했다. "너는 진정한 야구 팬이 아니야. 어떻게...그럴수가..." 그때부터 우리 집엔 롯데 팬과 두산 팬이 같이 산다.


두산 vs 롯데 야구경기

지난 주말, 잠실에서 롯데와 두산 경기가 있었다. 두 아들과 남편, 그리고 막내동생이 함께 갔다. 남편과 큰 아이는 롯데, 동생과 둘째는 두산 편이다.  "엄마는 오늘 누구 응원할 거예요?" "난 치킨 먹으러 가. 알면서. 경기만 일찍 끝나면 좋겠어." 난 공평하게 치킨 편이다. 야구 보는 걸 즐기는 가족들 옆에 앉아 치킨을 먹는 게 유일한 낙이다.  치킨 먹고 힘이 나면 지는 편에 힘을 실어주고 쿵짝쿵짝 리듬감이 차진 응원가를 따라 부른다. 특히 경기 말미에 롯데 관중석에서 '꽃 피는 동백섬에...'라는 노래 나올 때가 가장 신난다. 곧 집에 간다!


두산 vs 롯데 야구경기

저녁 경기 예매를 놓친 우리는 일요일 오후 2시, 외야 3루 자리를 겨우 잡았다. 이날따라 봄볕은 여름볕으로 돌변했다. 애국가 부를 때 머리 꼭대기에 머물던 해는 경기 끝날 때까지 왼쪽 뺨 근처로 살짝 내려왔을 뿐 사라질 줄 몰랐다. 1년치 광합성을 하루에 다했다. 더웠지만 참았다. 마약김밥을 먹었고 닭강정과 만두도 차례차례 입에 넣었다. 그렇게 2시간을 보냈다.


경기는 지지부진했다. 물론 흥미진진한 순간도 있었다. 뒤처진 롯데에서 2점 홈런을 날렸다. 마침 난 동생이 건네준 빈 맥주캔을 정성껏 찌그러뜨리고 있었고, 그 사이 관중들은 난리가 났다. '뭔 일 난겨?' 고개를 들자 몇 초만에 상황은 종료됐다. 연장전에서 롯데가 더블아웃 당한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난 입술을 실룩이며 남은 치킨을 챙기고 있었다. '당최 언제 끝나는겨...' 뭐 늘 이런 식이다. 집에서 보면 리플레이와 해설이라도 있지.


경기는 12회말 연장까지 갔다. 4시간이 넘었다. 무승부, 아무도 지지 않았지만 아무도 이기지 않았다. 땡볕 아래 4시간동안 앉아 있느라 바지는 축축하게 젖었고 머리는 땀에 들러 붙었다. 얼굴은 발갛게 익어 화롯불 속 고구마 같았다. 이러려고 그리 오래 앉아서 야구를 본 겨? 주말 집에 있었으면 책도 읽고 신문도 보고 커피도 마셨을텐데. 갑자기 피곤해졌다.


두산 vs 롯데 야구경기

그렇다고 야구 관람이 그저 고통스러운 건 아니다. 야구 이야기할 때 신나는 남편과 사춘기 두 아들을 보는 건 즐겁다. 만날 욕하면서 야구 보는 남편이 결코 이해되지 않지만 나와 다른 취향을 가진 그 덕분에 아이들 관심사도 넓어다. 내겐 없는 해박한 스포츠 상식을 가진 아이들이 가끔은 멋있어 보인다. 야구에 미쳐 온통 머릿속에 야구 생각만 하는 아이들을 호통치곤 했는데 그것도 한때다.


매 시즌이 되면 온 가족이 야구장 나들이를 한다. 난 치킨을 먹으며 선탠을 하고 못 견디게 덥다 싶을 때 슬쩍 불어오는 바람을 황송해한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도대체 언제 끝나는가' 한숨을 쉬다가도 초록 잔디밭에 눈이 머물면 멍 때리며 머리를 비운다. 점수도 안 나고 치킨은 이미 다 먹어 배부르면 가만히 눈을 감고 졸기도 한다. 거대한 대중 속에 홀로 진공상태에 머문다.


집에 오자마자 곯아떨어지고 다음 날 아침 눈 뜨기 버겁지만 그래도 야구장에 안 간다는 말은 안 한다. "치킨만 사주면 돼. 다음엔 KT구장으로 가자. 거긴 진미통닭이 있어! 이왕이면 낮 경기 말고 저녁으로 예매해주라. 해가 너무 뜨거우면 치킨 먹기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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