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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메기 한 마리

by 오르

불쑥 나타나 마음을 헤집는 사람들이 있다. 내 인생에 끼어들어 재를 뿌리는 사람. 평안한 일상에 돌을 던지는 사람. 그 인간만 없으면 좋겠는데 왜 등장했는지 원망스럽다. 삶에 불청객 같은 사람, 피하고 싶은데 자꾸 맞닥뜨린다. 버겁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서 주인공의 아빠가 그러하다. 술을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고 역마살까지 껴서 집안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화를 부르는 존재. 엄마는 남편이 있으나 없는 것처럼 혼자 생계를 감당하며 고되게 살아낸다. 반면 엄마의 쌍둥이 자매, 이모는 속된 말로 '남편 잘 만나' 인생이 탄탄대로다. 지극히 넉넉하고 안정적이며 아름답고 완벽한 삶. 하지만 모든 것을 가진 이모는 사는 게 허무하고, 하루하루가 고단한 엄마의 삶은 치열하다. 마치 수조 속 메기 한 마리 때문에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하는 청어 같이, 남편이 헤집어놓은 삶의 자리를 회복하려 무던히도 애쓴다. '불가사의한 활력'으로.


자기 계발 분야에서 유명한 김미경 강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집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이 많아지자 누군가 집에서 피아노 교습을 하는 건 불법이라며 신고했다고 한다. 그는 그 일을 계기로 학원을 차렸고, 강사의 길을 걷게 됐고, 스타 강사로 자리매김했다. 어떤 방해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만나고 돌아서면 불쾌함이 강하게 남는 사람이 있다. 그는 대화의 맥락을 읽지 못하고 자기 생각만 밀어붙인다.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지 전혀 관심 없다. 지금 머릿속에 있는 말을 다 쏟아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직 자기 말만 앞세운다. 대화는 툭툭 끊긴다. 그 사람과의 시간을 견디면서 생각한다. 혹시 나도 저렇지 않나, 나도 누군가에게는 저런 불편한 존재는 아니었을까. 어떤 모임에든 '진상', '빌런'이 있단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그 '진상', '빌런'일 수도 있다고.


공적으로 만나는 '메기'는 급이 세다. 의견을 거칠게 전하거나, 운영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사전 약속과 달리 중간에 덜컥 환불을 요청하기도 한다. 오, 이리 당황스러울 수가.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아, 내가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게 있구나. 예상 밖 공세로 내가 일하는 방식을 돌아보고, 놓쳤던 부분을 알아채 보완한다.


이전에 글을 쓰면서 '우리는 ~ 한다'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누군가 이런 댓글을 남겼다. "누가 '우리'인가요?" 독자가 내 편이라는 순진한 믿음에 찬물을 끼얹는 말 한마디. 그는 내 생각에 공감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아 글이 그저 불쾌했던 모양이다. 이후로 '우리'라는 단어를 쓸 때 한 번 더 생각한다. 무심결에 쓰는 단어의 무게가 꽤나 크다는 걸 알았으니 생각을 깊게, 표현을 정교하게 하도록 채찍질한 익명의 댓글은 내게 과외 선생이 된 셈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배경과 생각, 감각을 지닌 채, 불완전하게 만난다(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라는 말은 넘겨주시기를!). 어떤 사람은 짧게 스쳐가고, 어떤 사람은 긴 그림자를 남긴다. 그들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생각보다 오래 머물기도 한다. 수만 페이지에 달할 한 사람의 인생에서 단 한 장면만 출연한 이들이, 때로는 가장 선명하게 기억된다. 그들은 영화 속 '신스틸러' 같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한 장면을 통째로 가져가 버리는 존재들. 평온한 일상에 묘한 결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땐 모른다, 그들을 만난 이유를. 돌아보면 그런 이들이 내 시선을 넓히고, 굳어진 생각을 흔들고,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날 깨우는 메기들. 그들 때문에 마음 고생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 덕분에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내가 누군가의 메기였던 적도, 신스틸러였던 적도 분명 있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자극하기도 하고, 생각의 물꼬를 틔워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때로 심란하게도 했을 게다. 삶이란 이렇듯 마주한 서로를 조금씩 흔들며 확장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 반갑지는 않지만 미워하고 분을 내는 건 손해다. 수많은 메기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어 줄 테니, 그리하여 언젠가 큰 시련이 오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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