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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렇게 열심히 할 일인가요?"

강의 도중 래퍼가 된 이유

by 오르

강의하는 입장에서 학교나 기관에서 주최하는 강의는 장단점이 분명하다. 참석 안내 및 홍보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강사 경력에 든든한 '한 줄'이 된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반면 '무료'라는 단어가 주는 느슨함에 대비해야 한다. 내가 받는 강의료는 주로 기관에서 지출하는 나랏돈인 경우가 많다. 돈을 지불하는 곳과 혜택을 누리는 대상이 다르다는 뜻. 강의에 집중하는 열혈 참가자가 대부분이지만 '내돈내산'이 아닌 까닭에 배움의 자세가 살짝 '프리'해지는 이들도 종종 마주한다.


몇 달 전 서울 모처에서 청년기자단 강의를 의뢰했다. 기사 작성은 내가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다. 노하우를 전할 생각에 물 만난 물고기처럼 흥이 나지만 수강생들이 어떤 자세로 임할지는 알 수 없다. 강의는 대화여서 오고 가는 에너지가 강의 완성도를 끌어올린다. 하지만 청중의 반응이 미지근하다고 해서 약속된 시간보다 강의를 일찍 끝낼 순 없다. 수강생의 불확실성을 대비하는 방법은 철저한 계획과 준비. 분 단위로 강의 큐시트를 짜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감안해 플랜 B를 마련한다.


20~30대 청년들과 함께 한 강의는 예상 밖으로 밀도가 높았다. 청년기자단으로 선발된 11명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두 차례, 총 4시간동안 기사 작성 기초를 다루고 실제 기사를 쓰고 개별 피드백까지 제공하느라 강의는 꽤 빽빽하게 진행됐다. 쉬는 시간 없이 매번 2시간씩 달렸지만 화장실을 가겠다고 자리를 비운 이는 없었다. 잠시 졸음에 겨워 눈동자가 흔들리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동료의 질문에 이내 정신을 차렸다.


강의 내내 예비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기자로서의 직업윤리, 실제 기사 작성의 어려움, 취재원을 인터뷰하는 스킬 등 그들의 질문은 실질적이었다. 이를테면 "인터뷰 시간이 길어지는데 인터뷰이가 자신의 이야기에 취해 기자 질문에 답을 안 하면 어떻게 하는가?", "6하원칙에서 장소가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아도 기사에 제시해야 하는가?",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을 어느 정도 써야 하는가?"


질문 수준은 곧 강의 수준을 의미한다. 다양한 질문에 답할 수 있다는 건 강사의 즐거움이다. 수강생들의 집중도는 올라가고 강사도 신바람이 난다. 질문이 꼬리를 문다. 점점 큐시트에 적힌 예상 시간과 강의실 벽시계의 시간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아직 갈 길이 구만 리인데 시간이 없다! 그렇다고 질문을 댕강 자르고 준비한 강의를 일방적으로 쏟아낼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강사만 만족스러운, 강사에게만 완벽한 강의가 되고 만다.


"선생님, 저 이거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누군가 또다시 손을 번쩍 올린다. 이렇게 열심히 할 일인가. 배우고자 하는 태도는 가르치는 사람을 자극한다. 강의 계획서에 없던 내용이 기억 저편에서 빠르게 올라온다. 평소 '기자'라는 직업을 추천하지 않는다. "할 수 있다면 보다 더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농을 섞어 진담을 전하곤 한다. 이날만은 차마 그리할 수 없었다. 기자가 꿈인 이들에게 찬물을 뿌려서야 되겠는가. 그들의 열정과 호기심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낸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처음부터 끝까지 강의를 복기한다. 알려줄 내용은 많고 시간은 부족해 래퍼처럼 속사포로 떠들어댄 게 마음에 걸린다. 강사로서 시간 관리 능력이 부족했을까. 아니다. 청년들의 질문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고 구체적이었으며, 답변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냈다. 반드시 계획대로 이뤄져야 좋은 강의는 아니다. 강의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며 알찼고 뜨거웠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능력이라는 말이 있다. 의지와 열정이 무언가 이뤄내는 강한 동력이다. 가능성이 거대한 바다 같은 청년의 때. 그들은 언론사 기자였던 내가 부럽다지만 난 눈빛이 반짝이던 그들이 부러웠다. 과연 내게도 이렇게 열심히 배우려던 때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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