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매일 밤 호텔에서 잔다
생활필수품 가운데 결코 돈 주고 사지 않는 게 있었으니 바로 이불이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에 널린 게 이불이었다. 이불은 우리 집 자산이었고 내 부모의 사업 품목이었다. 이불과 맞바꾼 돈으로 엄마 아빠는 나를 공부시키고 취업시키고 결혼시켰다. 난 이불집 큰딸이다.
이불, 베개, 담요가 필요할 땐 '엄마'를 외치면 된다. 아니, 외쳐야 한다.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이불을 골라 가질 순 없다. 엄마가 파는 이불 가운데 재고로 쌓인 것을 하사 받는 게 순리다. 엄마 이불을 두고 감히 남의 이불을, 그것도 내 돈 주고 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반역이다.
그날은 베개를 샀어야 했다. 오랜 시간 앉아서 일하느라 뻣뻣해진 목덜미와 어깨가 주기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뒷목의 굴곡과 잔뜩 긴장한 어깨를 받쳐줄 베개를 찾아 헤맸다. 물론 우리 집에도 베개는 많다. 엄마 가게에는 더 많다. 하지만 이때 베개는 내게 '의료기기'였다. 효능 만점 '의료기기'를 물색하다 호텔 베개, 그것도 거위털(구스) 100%의 00 호텔 베개가 단연 최고라는 후기를 발견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의 이불집에 들어간 적 없던 내가 백화점 이불 코너를 찾은 건 그래서였다.
불행하게도, 이불집 딸은 이불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베개 아래 깔린 이불이 범상치 않았다. 영업력이 탁월한 점원은 베개를 포장하면서 슬쩍 고급 정보를 흘렸다. "고객님, 내일부터 구스 이불 세트에 한정 프로모션이 들어가요. 이건 정가의 반값도 안 돼요. 저희 침구류 유명한 거 아시죠? 100% 헝가리 구스. 이제껏 판매하면서 이렇게 파격적으로 할인하는 건 처음이에요. 벌써 예약 전화가 몇 통이나 왔는지 몰라요."
귀가 간질간질했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지라 난 겨울이면 이불 두 개를 겹쳐 덮었다. 내게 좋은 이불은 적당한 무게감으로 몸을 지그시 눌러주면서도 무겁지 않아야 한다. 이불과 내 몸 사이에 얇게 틈이 생겨 한기가 들어서도 안 된다.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건 구스 이불인데 엄마는 이제 더 이상 이를 취급하지 않는다. 더 비싼 이불은 있는데 구스는 없다. 명품을 저렴하게 살 기회를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엄마의 얼굴이 아른거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우리 집에 오는 일이 거의 없다. 어쩌다가, 몇 년에 한 번 오는 엄마의 눈길이 불편해서 300일이 넘는 나의 단잠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리고 일흔이 넘은 우리 엄마는 이제 이불 장사를 접을 계획이다. 요즘도 그냥 소일거리로 가게에 나가 있을 뿐이다. 엄마가 준 여러 채의 이불을 이고 지고 사는 것도 20년 가까이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불에 돈을 써 본 적이 없는 나는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했다. 자는 일에 그리 많은 돈을 써야 한단 말인가. 아니, 인간의 삶에 있어 잠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크고 중한가. 수면 부족은 만병을 불러일으킨다. 우울증, 불안, 자살 위험을 증가시키고 인지 기능을 떨어뜨려 치매 유발 가능성을 높인다. 면역력이 떨어지고 대사 장애, 호르몬 불균형도 온다. 고혈압, 심장병 같은 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잠을 덜 자면 살이 더 찌고 더 빨리 늙는다. 잘 자고 일어나면 감기도 떨어지고 몸살도 사라진다. 키도 크고 피부도 재생되고 뇌도 활성화되고 사람이 생기가 돈다. 잠이 보약이라 하지 않나.
하루동안 열렬히 고민한 끝에 남편에게 이불을 선물로 받았다. 공범이 필요했다. 엄마, 미안해요...
구스 이불을 덮는 순간, 이불집 딸은 세상을 얻은 듯 행복했다. 가벼운 거위털 사이로 공기가 가득했다. 사각사각 이불 커버가 피부에 닿는 느낌이 상쾌했다. 내 몸의 면적과 무게에 맞춰 이불도 내 몸을 적절히 눌러 감쌌다. 착 감기는 이불속 포근함이란. 겨울이면 온몸을 이불로 돌돌 말고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잤다. 마치 모래마사지를 하는 해변의 여인처럼. 열기를 머금은 모래 속에 파묻힌 듯 자체 발열되는 이불 덕에 더는 등이 시리지 않았다.
구스 이불을 덮고 난 고요히 숙면을 취한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이내 잠이 든다. 곁에 누운 남편에게 몇 마디 걸다가 툭 곯아떨어진다. 중간에 잘 깨지도 않는다. 그리고 새벽이면 눈을 뜬다. 이불이 거추장스러운 한여름, 이불 커버를 벗겨 세탁하고 구스 이불속은 햇볕에 잘 말렸다. 입추가 지나니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발치에 구스 이불을 잘 개켜 두고 있다. 새벽녘에 추우면 끌어당겨 덮을 수 있도록. 난 매일 밤 호텔에서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