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 스위치를 바꿔!
"엄마! 시험 보던 중인데 정전됐어요. 컴퓨터가 그냥 꺼졌어요."
전기가 나갔다. 아파트 비상전력은 가동하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는 멈췄으며, 와이파이도 죽었다. 하필 아이가 온라인 수업 기말고사를 치르는 날, 바로 그 시간, 밤 9시 46분에 시험문제 17번을 풀 때 이런 사달이 일어난단 말인가. 아직 풀지 못한 문제가 3분의 2 이상 남은 상황. 쇠털같이 많은 날을 두고 아이는 왜, 굳이, 수업기간 종료 하루 전날 기말고사를 봐야 했던가. 미리미리 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었던가. 어이없는 상황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입 밖으로 비집고 나왔다. "아니, 도대체, 이게 뭐야...!" 둘째는 풀이 죽어 말했다. "... 제가 이제 해결해 볼게요."
어둠 속에서 사태를 수습하려는 아이가 보였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 필요한 건 책임 추궁이 아니다. 남은 시험을 되돌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이는 미국 대학에서 제공하는 AP수업을 듣는데 모든 강의와 시험이 온라인으로, 영어로 이뤄진다. 아이는 '어둠'을 촬영해 담당 교수와 학교 행정실에 [Urgent](긴급) 이메일을 보냈다. 갑자기 발생한 정전 때문에 시험을 마무리하기 전에 답안이 제출됐으니 다시 볼 기회를 달라는 요청이 골자였다. 당황하지 않고, 망연자실하지 않고 '그다음'을 헤쳐나가려는 아이. 대견하다. 불평과 원망, 걱정과 불안을 향하던 내 마음은 슬금슬금 안도와 감사, 기대로 바뀐다.
불평과 감사는 교묘하게 시소 탄다. 마음속 단 하나 있는 스위치를 서로 차지하려 다툰다. 어느 방향으로 스위치를 올리느냐에 따라 마음 상태가 달라진다. 생각이 달라지고 표정이 변하고 말과 행동이 바뀐다. 불평 스위치를 올리면 세상의 미세한 결함에 눈이 꽂힌다. 컵에 물은 늘 반만 차 있다. 나머지 반이 부족하다며 투덜거린다. 갈증에 허덕이며 더 채우려 기를 쓴다.
감사 스위치를 올릴 때 한 줄기 빛이 마음속 어둠에 길을 낸다. 산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에서 모래알 같은 보석을 찾기 시작한다. '난데없는 정전이 당황스럽지만 아이가 절망하지 않잖아.', '이렇게 또 긴급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않겠어?' 평안할 때 드러나지 않았던 아이의 문제해결력을 마주한다. 무엇보다 전기가 나간 그 순간,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지 않던 게 얼마나 다행인가!
자그마한 마음속에는 언제나 불평과 감사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다닌다. 어느 쪽에 귀를 더 기울일지, 스위치를 어느 방향으로 올릴지는 선택의 문제다. 상황을 주도하느냐, 현실에 끌려다니느냐. 우린 매일 팽팽한 주도권 싸움에 놓인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불평은 스멀스멀 올라온다. 반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불쑥 내게 등장할 때 감사를 찾으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드는 건 막을 수 없지만 둥지를 트는 건 막을 수 있다'는 마틴 루터의 말처럼 구시렁구시렁 입 안에 불평이 차오르기 전에 고개를 거세게 젓는다. 훠어이 훠어이 날아가거라.
별안간 불이 번쩍, 전기가 들어온다. 정전된 지 2시간 만이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반갑다. 시험을 치르는 중에 정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건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왜 하필, 그날, 그래야 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최선을 다해 대처했고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극적 반전 끝에 우리의 결론은 해피엔딩.
하루에도 수십 번 불평과 감사가 오간다. 불평이 또 다른 불평을 낳는 건 순식간이어서 매일 스위치를 바꿔본다. 가능하면 감사함에 오래 머물기. 양은냄비 같은 내 마음이 주물 솥이 되는 그날까지. 딸깍, 딸깍딸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