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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형의 송년회는 일찍 시작된다

한 해가 가기 전, 꼭 만나야 할 사람들

by 오르

12월이 오기 전에 송년회를 하기로 했다. 세밑에 다가가 연말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괜스레 몸도 마음도 바쁘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얼마나 많은 모임 안에 속해 있는가. 이런저런 만남에 치이기 전에 시간을 선점해야 한다. 내향형 인간 입장에선 연말일수록, 특별한 시간일수록 홀로 앉아 스스로 침잠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새해를 맞이할 에너지를 얻는다. 한 해가 가기 전 꼭 만나야 할 사람들에겐 조금 이른 시간을 할애한다. 매주 글을 나누는 사람들, 나의 오랜 글벗들과 11월 마지막 금요일에 송년회를 약속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모일 때 가장 어려운 건 날짜를 정하는 일. 모두에게 가능한 시간을 맞추는 건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다. 할 수 있다면 모든 멤버를 빠짐없이 불러 모으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볼 수 없는 이들의 얼굴이 며칠간 마음에 오르내린다. 그다음은 장소 정하기. 멀리 흩어진 이들이 편히 닿을 수 있는 곳을 찾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올해 송년회 장소로 낙점된 곳은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의 접근성은 도심보다 떨어지지만 서로서로 동선을 파악해 오가는 길을 도와주기로 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굽이굽이 오르막이다. 일차선 도로여서 마주 오는 차들과 아슬아슬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높이 솟은 나무를 따라 펼쳐진 길은 잠시 주의를 잃을 만큼 아름답다. 주말이면 줄줄이 이어지는 차량으로 주차장까지 들어가는데 하세월인데 평일이라 여유롭다. 시작부터 기분이 좋다. 남들 일할 때 우리끼리 노는 맛이랄까.


나즈막한 산을 따라 펼쳐진 성곽은 서울 동쪽 바깥을 지키던 요새였다. 400미터가 채 되지 않은 정상부에 편편하게 분지가 형성되어 있고 그 아래 경사가 가팔라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군사요지였다. 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 때 쌓은 토성으로 시작해 그 사이 여러 번 개축을 거듭했고, 조선 인조 때 지금의 형태를 갖췄다. 인조 14년(1636), 청나라가 쳐들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해 45일 버텼지만 결국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서 한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니. 이곳에 오면 영화 <남한산성>의 처연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성을 오르는 산책길은 고즈넉하다. 구두를 신고도 오를 수 있을 만큼 평평하고 완만하다. 숲 사이로 닦아놓은 길 끝에 하늘이 걸린다.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꼽히는 데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서 늘 단정하다. 산성을 따라 오르면 성벽 너머로 서울 동쪽이 한눈에 보인다. 누각 ‘수어장대’까지 우린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오른다. 더없이 맑았던 이날, 구름 한 점 없는 늦가을 파란 하늘과 맞닿은 수어장대를 배경으로 선다. 넷이, 또 홀로.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잡는 일은 영 어색하지만 후엔 이마저도 추억이 될 게다. 망루에 앉아 잠시 쉬면서 바람을 맞으면 이마에 살짝 맺힌 땀이 식는다. 수어장대에 오를 때마다 조금 더, 조금 더 머물고 싶어 발걸음이 느려진다.


길게는 5년 전부터 인연을 맺은 우리는 글로 만났다. 한 해, 두 해 쓰는 행위는 동일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과 내가 글로 나누는 이야기는 농밀해졌다. 30년 전 소꿉친구와 툭닥거리다 결혼한 연애사부터 다양한 인간 군상 속에 겪는 직장생활의 노고, 제2의 인생을 꿈꾸며 도전하는 일, 다가올 미래의 계획까지 우린 스스럼없이 주고받는다. 누가 흉볼까 걱정하지 않고, 불필요한 우열감에 시달리지 않고. 격 없이 수다를 떨지만 결코 가볍거나 요란하지 않다. 30대부터 60대까지, 마치 막내딸과 막내 동생, 둘째 언니, 큰 언니가 시골 툇마루에 앉아 얘기를 나누듯, 따뜻하고 달큰하게 생각을 나누며 우린 서로 공감하고 위로받고 깨닫는다.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내려놓은 채 그저 '나 자신'으로 글을 쓰면서 만난 사이라 가능한 일이다.


글쓰기가 유익하다는 것, 글 쓰면 좋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비밀이다. 웬만한 사람은 상식처럼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선뜻하지 않는, 꾸준히 하는 것은 더 어려운 특별한 작업. 글 쓰는 사람들을 만나면 새삼스레 알게 된다. 나를, 일상을, 삶을 쓰는 것보다 더 고귀하고 가치 있으며 품격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세상 어느 곳에 가도 만날 수 없는, 내 인생 한 귀퉁이에 소중하게 허락된 마음의 벗들. 올해도 부족한 내게 든든한 힘이 되어준 글벗들에게 마냥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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