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째 함께 사는 부부의 주말 아침
남편과 단둘이 바깥 밥을 자주 먹는다. 주로 토요일, 오전 5시에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고속도로를 달려 아침예배를 드리고 나오면 8시. 물 한 잔으로 마른 입만 축인 터라 허기진다. 배가 고픈 건 같은데 원하는 메뉴는 서로 다르다. 난 쌉싸름한 커피와 버터향 가득한 빵을, 남편은 뜨끈한 국밥을 선호한다. 20년을 함께 한 이가 비슷한 시간, 비슷한 상황에서 무엇을 먹고 싶어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누가 먼저 상대의 취향을 모른 척하고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지가 관건이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 늦가을 바람이 스산하다. 남편의 입맛에 맞춰도 나쁘지 않을 날씨다. "여보, 콩나물국밥 먹으러 갈까요?"
남편은 국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옛말에 국물의 시원함을 알면 술도 잘 먹는다고 했다. 그는 술로 한때 천하를 평정했다. 적잖은 무용담은 소싯적 이야기가 됐지만 해장 노하우만큼은 여전하다. 쓰린 속을 든든히 채우는 데는 국밥만 한 게 없다. 투박한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국물, 숟가락으로 바닥을 휘저으면 몽글몽글 올라오는 하얀 밥알. 그에게서 난 국밥을 배웠다. 소의 온갖 내장을 넣고 된장을 풀어 팔팔 끓인 해장국을 섭렵하기 시작한 것도 그와 만나면서부터였다. 지갑 사정이 뻔했던 가난한 청춘에겐 콩나물국밥이 제격이었다. 남편과 사귀기로 한 다음 날, 둘이 마주하고 처음 먹은 메뉴도 콩나물국밥이었다. 당시 내가 살던 대학가에 저렴하지만 풍성하게 반찬을 내주는 식당이 있었는데 그날 말간 국물 속에 콩나물이 있었다. 내 밥숟가락 밖으로 삐져나온 콩나물을 당시 남자친구였던 그는 조심스레 밥 위로 올려줬다. 아니, 밥은 내 손으로 내가 알아서 먹는 걸로만 알았던 모태 솔로 여대생은 그의 세심한 젓가락에 흠칫 놀랐다. 그때 이 사람과 평생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사실 콩나물은 특별할 게 없는 식재료다. 그늘에서 싹을 틔운 콩의 뿌리는 한국인 밥상에 부담 없이 자주 오른다. 콩나물 무침, 콩나물국, 그리고 달래를 넣은 양념장을 얹어 쓱쓱 비벼 먹는 콩나물밥까지. 어릴 적 할머니는 콩나물을 직접 키웠다. 검은색 천을 씌운 시루 안에 물에 불린 콩을 넣고 자주 물을 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라는 게 신기해 천을 들춰 보려 하면 할머니는 콩나물이 시퍼렇게 되고 비린내가 난다고 나를 말렸다. 물가가 수직상승한 지금도 콩나물은 300그램 한 봉지에 천 원 안팎으로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너무 자주 봐서 익숙하다 못해 지루한 게 콩나물인데 우리 집 남자는 허구헌 날 콩나물국밥을 찾는다.
콩나물국밥엔 놀랄만한 변주가 없다. 늘 그렇듯 뜨거운 뚝배기에 콩나물이 그득 얹어있다. 국물은 맑다. 젓가락으로 조금만 휘저으면 안에 콩나물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보일 정도다. 뽀얗게 우린 고깃국물을 좋아하는 나는 맹물처럼 가벼운 육수에 실망한다. 콩나물을 헤치고 동그랗게 공간을 만든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게 잦아들기 전에 날계란을 깨 넣어야 수란이 만들어진다. 이때 휘저으면 안 된다. 아무리 밍밍해 보여도 계란 노른자가 풀어지면 콩나물국밥 본연의 맛이 흐려진다. 계란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올린다. 캬아, 바로 이 맛이야.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데 개운한 맛이라니 요상하도다. 다시 뜨거운 국물을 호호 불어 넘긴다. 크으. 콩나물을 무시하면 곤란하다. 콩나물에는 알코올 분해를 돕는 아스파라긴산이 있어 숙취 해소에 효과적이다. 남편이 콩나물국밥에 진심인 것도 이유가 있다.
뚝배기가 적당히 식으면 두 손으로 번쩍 들고 남은 국물을 꿀꺽꿀꺽 들이켜야 한다. 반복되는 숟가락질로 따라갈 수 없는 국물의 뜨끈함이 배꼽까지 차오른다. 이젠 뚝배기를 45도쯤 기울여 받침에 얹는다. 바닥에 얕게 깔린 국물과 밥알이 그릇 귀퉁이에 얌전히 고여서 마지막 한 숟가락을 가득 채운다. 콩나물국밥은 이렇게 끝까지 비워야 한다. 먹고 나면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힌다. 온몸이 따끈해진다. 국밥집을 나와 내 손을 잡는 남편이 웃는다. "뜨끈한 걸 먹이니 손이 따뜻해지는군." 손발이 유난히 찬 나에게 온기를 불어넣는 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인 걸 남편은 가장 잘 안다. 배부르게 먹은 남편에게 이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건넬 타이밍이다. "여보, 이제 커피 마시러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