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현수 Apr 15. 2022

암환자의 가족으로 사는 법2

우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는 딸의 마음이란

엄마의 암이 발견된 후 우리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달라졌다. 우리 가족의 관심사, 대화 주제, 고민거리, 생활은 철저히 엄마의 병세에 맞춰서 흘러갔고 단 한 번도 암의 존재를 잊고 살아간 적이 없다. 겉으로는 웃고 있는 부모님과 동생의 얼굴에서도 난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짐을 느낄 수가 있었으며 숨길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감각이 있는 이유는 내가 그들과 평생을 같이 살아온, 피를 나눈 가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사자인 우리 엄마는 이런 우리(남편, 딸과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느껴왔고 우리에게 감춰왔을 지 생각하니 엄마 나름대로 얼마나 괴로웠을 지 상상이 안 간다.



2017년 부모님과 다녀온 영국 여행 중 사진

2017년 7월 중순, 해외 여행을 다녀왔던 부모님과 나는 시차적응이 될 쯤이었으니 여행을 다녀온 지 2주가 지난 시기었던 것 같다. 당시 인생의 거의 마지막 생리일 것 같다는 엄마는 평소보다 생리통에 많이 괴로워하셨다. 평소에도 생리통이 심하지 않은 엄마였는데, 그 생리는 유독 지독하리만큼 아팠다고 한다. 아이를 낳기 전에 산통은 생리통처럼 아프다가 점점 더 아파지는 느낌이라는데, 곧 아이를 낳을 것처럼 아프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난다. 진통과 비슷한 생리통이라니, 상상도 못할 고통인지라 엄마는 생리가 끝나면 얼른 병원을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원래 엄마는 1년에 한 번 산부인과 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으셨다. 10여 년 전에 난소에 물혹이 발견됐었고 당시에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였다. 다만 매 년 검사를 해보자고 의사 선생님은 제안하셨고 엄만 그 후 충실히 매 년 산부인과 검진을 갔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딱 한 번 그 검사를 건너 뛰었고 1년 반 정도의 공백기가 존재했다. 그 1년 반의 공백기 동안 그 물혹이 엄청나게 커지고 암으로 발전한 것이다. 지금 기억하기론 그 커진 물혹은 아기 주먹 크기만큼이나 커져있었으며 수술이 시급하다는 진단을 받았었다.

엄마가 심각한 생리통으로 고생하다가 생리가 끝난 후 동네 큰 종합병원에 산부인과에 진료를 받으러 가셨을 때, 그 날 엄마와 했던 통화를 기억한다. 걱정했던 것보다 더 안 좋은 결과가 나오자 밝고 힘차던 엄마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어두웠다. 조직검사 결과는 암이었고 엄마는 단 하루밤 사이에 암환자가 되어 있었다.

크게 걱정 안 했던 우리 가족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었다. 암? 우리 엄마가? 암? 우리 엄마가?

암환자를 근처에서 봐왔던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암은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확실한 검사 결과와 함께 선고를 받기 전까진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삶을 살다가 선고를 받는 그 순간 '환자'가 된다. 그 전까진 '저녁은 뭐 하지?', '오늘 장 봐야겠다' 라는 일상적인 고민들을 하고 일상의 문제들을 해결해가면서 살아가던 인간에게 "너는 지금 이 순간부터 아픈 환자다."라고 신이 말해주는 느낌이랄까. 글을 써가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암환자와 암환자의 가족들에겐 의사 선생님이 곧 신이오 신의 대리인인 느낌이다. 의사선생님이 그렇다하면 그런 것이며 그러지 말라 하면 절대 그러면 안되는 것이고 삶의 어떤 부분을 규정지으면 빼도 박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하루 사이에 암환자와 그 가족이 되어 있었다.

거실 중앙에 있는 식탁에 앉아 엄마 아빠로부터 엄마가 암에 걸렸음을 알게 되자 동생은 엄마의 손을 잡으며 훌쩍였고 ... 조용히 눈물 흘렸던  같다. 다들 각자의 방식대로 괴로워했던 날이었다. 가족들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여주기가 싫었던 나는 자리를  나와 우리  빌라 놀이터로 갔다. 그러곤 당시 내가 가장 의지하고 좋아하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끊임없이 울었었다.  때의 기분은 뭐랄까,  마음을 지탱하던  기둥이  동강으로 꺾어져서 나라는 건물이 기초부터 붕괴되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기둥이었으니까. 세상에 무슨 일이 있어도 눈 하나 깜빡안 하고 내 갈길 만을 갈 사람. 세상과 주변인들에게 부끄럼 한 점 없이 당당할 수 있었던 대단한 사람.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며 많은 사람들의 본보기었던 훌륭한 성악가, 엄마, 아내, 누나. 본인의 삶을 너무 사랑하기에 그 누구보다 삶을 소중히하며 살아갔던 엄마. 엄마...


암환자가 암 선고를 받고 난 후 겪는 심리의 변화를 다룬 유명한 논문이 있다. 그 논문에 따르면 암환자가 겪는 심리 단계는 5단계로 나뉜다고 한다.



• 1단계 : 부정
처음 암을 진단받게 되면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은 자신에게 병이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진일 것이라 생각하며 여러 병원을 다니며 확인 받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 2단계 : 분노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사실로 인식하게 되면서 화가 나게 됩니다.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려야하는 것인지 한탄하며 분노하며 자신에게 소식을 전한 의료진, 주변 사람에게 화가 나기도 합니다. 또한 미리 예방하거나 찾아내지 못한데 대해 후회하고 자책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 3단계 : 타협
부정하고 분노하는 것이 해결책이 되지 못함을 인식한 뒤, 여러 가지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수명을 연장 받으려 하는 등 타협을 모색하는 단계입니다. 재산을 공익재단에 기부한다거나, 선의를 베푸는 행동을 하며 자신의 병의 경과가 좋아질 것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정상적인 치료를 거부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유사치료를 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 4단계: 우울
자신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이 낫지 않는 것으로부터 우울해지게 됩니다.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사실들조차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자신을 애도하며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침묵하며, 사회적 관계로부터도 철수하게 됩니다. 우울증상이 심한 경우 적적한 치료를 통해 정상적인 사고와 의지를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 5단계: 수용
마침내 자신이 병이 있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는 마지막 단계로서 가장 성숙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용의 단계가 되어야 더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아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출처: 삼성서울병원 암교육센터 (http://www.samsunghospital.com/dept/medical/diseaseSub03View.do?content_id=1184&DP_CODE=CIC&searchKey=K&est=K&ds_code=D0002128)


암환자의 가족으로서 살아왔던 시간을 되돌아보면 위 5단계는 사이클과도 같다. 5단계에 들어섰다고 생각해도 어느순간 2단계로 돌아오기도 하고, 한동안 4단계에만 머물기도 한다. 그리고 저 사이클은 암환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적용되는 사이클이라 생각이 든다.


정신적으로 매우 성숙하고 단단했던 엄마도 본인이 난소암3기임을 받아드리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와 같이 살았던 20년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난 마음의 뿌리부터 흔들렸다. 아이처럼 울고 떼쓰고 분노하는 우리 엄마의 모습은 당황스러웠고 혼란스러웠다. 치료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죽음을 맞이한 사람처럼 "니가 결혼하고 애기 낳는 것까지는 보고 싶었는데..." 라며 엉엉 우는 엄마의 모습은 내 정신을 이리저리 흔들어놔서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잠옷을 입고 잘 준비를 하는 줄 알았던 엄마의 뒷모습이 조금 이상하길래 자세히 봤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엉엉 울고 있는 모습이었다. 50대의 어른이 우는 소리라고 하기엔 어색할 정도로 아이처럼 엉엉거리며 훌쩍거리며 우는 모습은 충격적이고 너무나 슬펐다. 원래 감정을 잘 들어내는 사람이었거나 감정기복이 있었던 사람이었으면 모를까 전혀 그러지 않았던 사람이 무방비의 상태로 그대로 본인의 슬픔과 절망감을 들어내니 더 속상했다. 엄마를 위로하는 위치에 있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어떻게 위로하고 토닥여주고 안심시켜주는 지 몰랐던 못난 딸이라 같이 울어주는 방법을 택했었다. 그리고 이 모습은 내 머리에 깊숙히 박혀 1학년 2학기 개강을 맞이하여 대학 근처 자취방으로 가는 버스안에서까지 내 머리 속을 괴롭혔다. 그 버스안에서 다시 한 번 난 깨달았던 것이다. 난 엄마와 몇 백 킬로비터 떨어진 외지에 있으며 우리 엄마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한 병에 걸린 환자라는 것을. 그리고 난 이 사실에 대해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나약한 딸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을 수용하고 이겨낼 수 있는 정신력은 나에게 없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내 삶과 엄마의 삶을 분리하고 독립적으로 보는 법을 몰랐었다. 엄마의 삶이 곧 내 삶이오 내 삶이 곧 엄마의 삶같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나라도 단단해져야 하고 내 삶을 충실히 살아야하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 못했다. 그 정도 성숙함은 20살짜리에게 기대하면 안 되는 것일까. 나는 결국 20살 1학년 2학기에 중도휴학을 하게 된다.


3편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 암환자의 가족으로 사는 법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