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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Mar 16. 2020

필름 카메라 (상)

조금은 로맨스

 

 계절이 한 번 바뀌고, 몇 번의 보너스를 받고서야 제대로 된 필름 카메라를 살 수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한 번 써봤는데 정말 일회성으로 끝난다는 게 어쩐지 아이러니했다. 이렇게 멀쩡한데 더는 소용이 없다니. 그 날부터 오래 쓸 수 있는 중고 필름 카메라를 알아봤다. 남대문 시장 방향 버스에 앉아 가만히 은숙 씨를 떠올렸다. 성공적인 흥정의 말과 표정이 필요했다. 살갑게 하면 좀 깎아주시려나. 당당하게 말해야 하려나.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갓 시작한 이십 대 초반은 조금 어수룩했다.


 카메라 가게는 다이소에 온 듯 조명이 훤히 밝고 선명해 1차로 자신감을 잃었다. 진열장엔 알지 못하는 각종 카메라와 렌즈로 가득했다. 너무나 전문가였던 아저씨와 너무나 비전문가인 나의 만남에 어떤 얄팍한 이익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서른 장이 조금 넘는 만원 짜리 지폐를 정확히 세어 지불한 뒤, 똑딱이를 손에 넣었다. 이 가격에 이런 매물 못 만난다는 말만큼은 기억하고 어깨가 으쓱해져 문을 나섰다. 벌써 6년째 고장 한 번 없이 잘 쓰고 있다. 잃어버린 롤도 몇 개 있었지만 필름 폴더에는 쌓인 추억이 꽤 많다.


 그렇게 옛날도 아닌데 사진 속 지난 내 모습에 자주 놀라움을 금치 못 한다. 교포처럼 각지고 진한 눈썹을 그리던 때가 있었고 쌀국수 면만큼 얇은 눈썹을 그리던 때가 있었다. 유독 필름 카메라를 산지 얼마 안 되었던 초반 롤에 내 사진이 많다. 카메라를 들고 나온 날이면 찍기보다는 상대방에게 나 좀 찍어 달라 부탁을 했나 보다. 필름이 어떻게 나올지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은 스스로의 모습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각 잡고 찍어달라 해서 그런지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하느라 애쓴 티가 났다. 괜히 멋쩍어져 카메라를 돌려받고 "그래, 뭐든 나왔겠지."를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뭘 찍었더라. 기억이 가물가물 해질 때쯤 사진을 받아보는 게 즐거웠다. 어떤 사진이 올까 기대하며 메일함을 수시로 들어갔다. 필름은 딱 한 번의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그 한 번에 모든 게 달려 있었다. 빛이 좋으면 색감이 쨍해 그 날의 날씨를 그리워하게 했고, 마음이 급하면 흔들린 비빔국수 사진 같은 게 나왔다. 점차 찍히는 일 보다 찍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이벤트성으로 애들을 찍었다. 두어 달 지나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면 소소한 선물을 주는 듯했다. 친구들은 누군가 못 나온 사진에 자비 없이 웃었고, 잘 나온 사진이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인물을 찍으면 이렇게 적극적인 반응이 오고 갔다. 몇 번은 길거리, 음식, 우리 집 부엌이나 내 방 따위를 찍었는데 찍기 전까지 어찌나 망설이게 되던지 막상 사진을 받고 나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왜 찍었는지 도통 모르겠는 거리 사진은 다시 보게 되는 일이 없었고, 예뻐 보이고 싶어 인형을 여기 놓았다, 저기 놓았다 한 방 사진은 어색하기만 했다. 사진 폴더 이름은 대게 친구의 이름, 만난 장소, 계절이 적혀있다. '제주도 영주' '봄에 다원이' '여름 애슐리' '가족 갈빗집' 이런 이름.


 복학을 하면서 학교 일로 바빠져 필름 카메라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 태식이를 통해 다시 사진과 필름 카메라의 존재를 상기하게 되었다. 2년 동안 태식은 군대를, 나는 긴 휴학을 마친 뒤 마주했지만 여전히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동기였다. 슬슬 여름이 다가오고 있던 5월. 태식이가 할 말이 있다고 학교 정문의 파리바게트에서 보자고 했다. 태식은 긴장하거나 생각이 많을 때 공기를 들이키며 말하는 버릇이 있다. 그날도 그랬다. "누나 사진 한 달 동안 찍어도 돼요?" 그가 물었다. "나를? 정말? 왜?" 태식이 사준 샌드위치를 먹다가 놀라 되물었다. 자기 사진을 좋다고 말 해준 사람이 내가 처음이라고. 그 뒤로 나를 지켜봤는데 표정이 다양해서 찍어보고 싶다고 했다. 태식의 사진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궁금해지는, 눈이 오래 머무는 사진이었다. 좋다고 말 해준 사람이 그동안 아무도 없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런 재미난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발상이 더 놀라웠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한 지 너무 오래된 기분이었다. 이제 모델이 된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살을 조금 뺄 걸. 직업이 모델이 된 냥 나는 급속도로 진지하게 참여해 태식에게 주제가 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전화를 걸었다.   


 태식은 한 달 동안 일상 속의 나를 담겠다 했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모습도,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모습도, 이태원에서 친구를 만날 때도,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수업을 듣는 내 모습도 찍어주었다. 처음엔 너무 어색해서 태식이가 나를 찍는 게 느껴지면 그냥 웃음이 났다. 도대체 어떻게 담길까 잘 상상이 안 되었다. 나는 거의 웃는 얼굴이었고, 우리 카페가 그렇게 포토제닉 하지도 않았으며, 강의실은 평범했다. 한 달이 완료되던 마지막 날, 그는 고마움의 표시로 우리 집 앞에서 폴라로이드 사진을 한 장 찍어주었다. 그리고 태식이 좋아한다던 미라이 짱 사진집을 선물 받았다. 6월이 시작되는 비 오는 밤이었다. 익숙했던 아파트 단지 장미 넝쿨을 태식은 마지막 필름에 담았다. 태식이 카메라에 눈을 맞추고 있으면 나도 잠시 멈춰 섰다. 우리 동네 장미가 이렇게 예뻤었나. 비를 맞아 촉촉해진 신선한 밤의 장미를 태식을 기다리며 들여다봤다.   


 대학생의 여름 방학은 빨리 찾아온다. 어느덧 6월 중순이 되어 방학과 함께 영화 촬영이 시작되었다. 나는 세트를 만드느라 내내 학교에 있었다. 과 애들은 촬영이 시작되면 꼭 응원을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의 일정 그런 거였다. 나 누구누구 응원 가!라는 말을 더 이상 들을 일도 할 일도 없어지니 알게 되었다. 태식이도 응원을 왔고 그는 내 손에 쇼핑백을 하나 쥐어주었다. 보통 응원은 젤리나 커피 같은 간단한 간식이었는데 살짝 무거웠다. 그동안 찍은 필름들을 모두 인화 한 사진 뭉치였다. 그는 이벤트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아는 사람 같았다. 긴 촬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부운 종아리를 누르며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와. 이런 모습도 사진이 되는구나. 내가 태식의 사진을 보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이었다.


 화장실 청소를 하는 모습도 고양이 똥을 치우는 모습도 그가 담아주면 사진이 되었다. 그의 사진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같았다. 그동안 친구들을 찍을  여기 ! 하며 예쁜 스팟을 찾아서 찍었는데 그는 자연스러운 순간을 새롭게 포착해내 살아있는 순간이 느껴졌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혔을  진심으로 마음에 들긴 처음이었다. 나는 사진을 계속 보고  봤다. 갑자기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될지 모르겠는 동시에 사진을 너무 찍고 싶었다. 뭐든 준비가 되었을  셔터를 눌렀던 나는 일상을 사진에 어떻게 담을  있을지 생각해  적이 없었다. 필름 카메라를 어디에 두었더라. 벽에 종아리를   올려두고 좋은 사진이 뭘까 생각하다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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