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인 Mar 28. 2020

필름 카메라 (하)

재미를 느끼는 동사 찾기


 그해 여름은 매미 소리도 기억하지 못하며 바삐 흘러갔다. 영화 촬영은 여름 방학에 밀집해 있어 햇빛 아래 서있는 날이 많았는데도 그랬다. 학교에 비가 충분히 내리고 나면 완연한 가을이 되었고 겨울은 한순간에 갑자기 찾아왔다. 2학기란 1학기보다 늘 두 배는 더 빠른 것이었다.


 그즈음 태식에게서 기말고사가 끝나면 출사를 가자고 메시지가 왔다. 시험기간에는 시험 끝나고 뭐 하고 놀지 계획하느라 시간이 잘 간다. 나는 신이 나서 답장을 했다. 태식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찍는 게 다 달라 그걸 보는 일이 재미있을 거라고 했다. 서로의 인생 샷을 찍어주기 위한 고군분투는 해봤어도 서로의 시선을 엿볼 수 있음을 생각하며 찍었던 적은 없었다. 그가 덧붙인 이유의 말이 깨끗하고 천진하게 느껴졌다. 재미를 탐구하던 어릴 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방구에서 각종 장식용품을 사 삔을 만들고 책가방에 매달 종이 인형을 꾸미던 나날. 친구랑 나란히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던 때. 잡지에서 마음에 드는 코디를 가위로 오려 스크랩 북을 만들던. 지금 내게 재미있는 것은 뭘까 생각했다. 살다 보니 재미를 느끼거나 취미 삼는 일이 편리하고 단조로워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무언가를 대하는 태식의 마음이 낯설고 반가워 출사 가는 날을 기다렸다. 전 날 밤. 잘 바르지도 않던 매니큐어를 장롱에서 꺼냈다. 프로페셔널하게 찍어보자는 다짐과 어쩐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뒤섞여 블랙을 골랐다.


 목도리를 두르고 아침 일찍 만나 우리는 미술관에 도착했다. 나는 무엇이던 찍지 못하고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 대었다, 떼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가 뭘 찍는지가 궁금해 시선은 태식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카메라 집은 벗겨놓고 아예 안 찍고 있는 스스로가 이상해 뭐라도 찍어볼까, 셔터를 눌렀다. 자동 플래시가 터졌다. 규정상 플래시 모드를 껐어야 했다. 직원의 주의를 받았고 사과를 드리자 괜히 민망해졌다. 멋쩍어 굳은 내게 태식은 귓속말로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더욱 아무것도 찍을 수 없었다. 며칠 전 태식에게 그날 찍은 사진들이 보고 싶다고 했다. 처음 보는 사진들이 많았다. "언제 나를 이렇게 찍었데?" 묻자 태식은 못 들은 척을 했다.  


 우리가 만나게 되면서 같은 공간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사진을 어려워하는 마음이 점차 사라졌다. 태식의 행동과 말이 내게 제일  영향을 주었다. 그는 가득 쌓아 놓은 필름들을 보여주며 "수인이  써도 " 했다. 프러포즈야 뭐야. "정말 그래도 ?" 조심스레 기뻐하다가도  쓰면 태식의 방에서 얼른 새로운 필름을 가져왔다. 인물이 아닌 자연, 거리, 물건, 풍경 등을 부담 없이 찍기 시작했다. 마음껏 써도 되는 롤이 물리적으로 많아서 라기보다  롤이 내 롤이 아니어서였다. 친구를 찍어줄 때면 선물의 의미여서 내겐 주인이 따로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에 대한 만족 또한  몫이 아니었다. 인물이 아닌 피사체는  스스로 만족해야 하는 사진이다. 필름   컷의 주인이 스스로가 되는 일은  어렵고 어색했는데 태식의 필름을 쓰자니 부담감이 적었다. 망설임 없이 찍고 싶은 대로 찍기 시작했다. 태식은  사진을 좋아했고 그의 계정에 올려도 되냐고 물어왔다. 당연히 좋았다. 칭찬 받고 함께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기뻤다. 진지하고 깨끗한 재미를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자신감과 함께.


 

 처음 마주 보고 케이크를 먹었던 . 태식은 "누나, 흑백 필름 써볼래요?" 물었다. 흑백 필름이라. 사용해  적이 없었다. 컬러가 빠진 사진을 보면 자꾸 무슨 색이었을까 궁금해지지 않나. 완벽한 회상이 불가능해서 왠지 손해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거 좋은 필름이에요. 비싸요." 기억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지. 나는 바로  흑백 필름을 끼웠다. 어떤 사진이 나올까 궁금했다. 우리가 먹던 티라미스와 필름 통을 첫 롤에 담았다.



 현상을 맡기기까지   달이 걸렸다. 이메일이  , 컬러 현상을 받았을  보다도 한참 오래 모니터를 응시했다. 묘하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가 보다. 어쩐지  깊고 거웠고 컬러 사진에 흑백 필터를 입혔을 때와도 달랐다. 태어날 때부터 흑백인 사진이 있는 거구나. 흑백을 덧입사진과도 완전히 다른 사진임을 깨달았다.   번뿐인 기억의 고유함은 컬러일  완전하다고 생각했을까. 때로는 흑백 사진이 컬러보다  진실 같았다. 창문으로 보이던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 차가운 그날의 공기가 선명하게 다가겨울이 그리워지면 한동안  사진을 바탕화면으로 설정해두었다.



 필름 카메라는 자주 손을 댈수록 주저함이 없어졌다. 치앙마이에서 태식과 나는 각자의 가방에 꼭 필름 카메라를 넣고 다니며 자연과 사람을 많이 찍었다. 같은 공간에서 어떻게 다른 사진을 찍는지 보자 했던 그의 지난 말을 내내 실현하고 있었다. 포토제닉 한 순간을 보는 눈은 점차 닮아갔다. 찍을까 하면 태식이 이미 셔터를 눌렀거나, 태식이 찍을까 하면 내가 벌써 셔터를 누르곤 했다. 우리는 아주 짧은 동안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집에 돌아오면 책상에 쌓인 동그란 롤의 숫자를 세는 게 좋았다. 한국에 돌아갈 날이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였다. 우리는 총 열여섯 개의 롤을 썼다. 서로의 시선을 흑백과 컬러로 다르게 보는 일은 현상을 하고 나면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글 쓰는 일이 사진 찍기랑 비슷하다고 느낀다. 재미를 느끼는 모든 일의 공통점일 수도 있다. 꾸준히, 자주 찍으며 어떻게 찍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근육이 키워지듯 쌓이는 느낌이 든다. 어떤 날은 가뿐하게 느껴지다가 또 어떤 날은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변주가 애틋하기도 하다. 어릴 적 모습처럼 재미를 탐구하던 자세를 이어나가고 싶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재미를 찾아 만드는 일. 그동안 찍은 영상들을 편집하고 그림을 그리고 또 사진을 찍으러 가자고 얘기를 했다. 재밌는 게 뭘까? 좋아하는 게 뭘까? 잘 생각이 안 나면 명사보다도 동사로 생각해보는 편이 도움이 된다. 내가 어떤 상태에 놓였을 때를 좋아하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취미: 요리 보다도 동사나 문장으로. 음식을 만들고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어줄 때가 좋다거나 뭉친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일이 좋다거나. 요즘 글 쓰는 일이 다시 어려워졌다. 차라리 자주 써보는 편이 어떨까, 방법을 바꿔봐야겠다. 컬러 필름이 지겨울 때쯤 흑백 필름을 써보면 또 새로웠던 것처럼.






작가의 이전글 필름 카메라 (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