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조각을 들고서
"새하얀 고양이가 나를 무는 꿈이었어. 그런데 하나도 아프지가 않았어. 그냥 정말 부드러운 솜뭉치가 나를 스치고 가는 느낌?"
엄마가 고양이 꿈을 꿨다고 했다. 살면서 나만큼 고양이를 예뻐한 적이 없으면서 고양이가 무는 꿈을 꾸다니. 고양이란 현생에서도 간택당하기 힘든데 꿈엔들 나올까. 내겐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식탁에 앉은 엄마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초록창을 켜 검색했다.
"어머. 고양이가 무는 꿈이 횡재수다. 좋은 꿈이네! 태몽으로도 치네!"
"그래? 엄마는 꿈을 잘 안 꾸는데 좋은 꿈을 간간히 꾸네."
엄마는 핸드폰을 잡고 잠시 고민했다.
"좋은 꿈은 바로 이렇게 말하면 안 되니까 조금 더 기다려보자."
밥을 지을 때 뜸 들이는 것에 예민한 엄마는 꿈을 전달할 때도 조금 뜸을 들이는 편이다. 그리곤 신이 난 얼굴로 누굴까? 했다. 왜 당연하게 본인을 제외시킨 걸 까. 듣고 싶은 소식이 따로 있는 걸까. 나의 취업 소식은 아닐 것 같다고 애저녁에 말해 주고 싶은데 어쩌지. 그러게 누굴까? 하며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엄마가 꾸는 길몽은 가끔 효력이 있긴 있었다. 오빠네 아파트가 당첨되었을 때도 엄마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진분홍 꽃들 사이를 걷는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사람들은 좋은 꿈을 꾸면 그 꿈의 주인을 찾아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다. 휘장을 걷고 청소를 한 뒤 나는 선배와 마주 앉아 빵을 나눠 먹으며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내 선배는 거울을 보다가 무엇인가 떠오른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앞 볼에서 볼터치로는 만들 수 없는 어떤 살아있는 생기와 기대가 뿜어져 나왔다.
"수인아, 나 정말 커다랗고 탐스러운 너무 예쁜 배 두 개를 안는 꿈을 꿨다!"
태몽으로도 여겨지는 이 귀한 꿈의 주인이 누굴까. 우리 매장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혹시 너야? 라고 물어보며 그 꿈의 주인을 우리는 궁금해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횡재 수일 수도 있지만 태몽일 수도 있다기에 나는 손사래를 하며 아니라고 했지만, 그 부푼 꿈의 주인이 될 뻔한 기분을 잠시나마 느꼈다. 반복되는 행위의 연속으로 따분할 때쯤 이런 소식은 환기가 되었다. 예고 없이 찾아드는 좋은 일을 상상하는 것으로 기분이 금세 좋아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그토록 믿고 싶은 걸까, 생각해본다. 아니면 내가 그 좋은 꿈을 물어다 주었는데 그 장본인이 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걸까. 나 역시 좋은 꿈을 꾸면, 다가올지도 모르는 행복을 괜히 헤아려본다.
좋은 꿈으로 해석되지 않아도, 예쁘게 간직할 수 있는 꿈을 한 조각쯤 갖고 사는 것도 좋다.
어느 해 여름, 베란다 문을 열어두고 낮잠을 자다가 나는 꿈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다.
스무 명쯤 되는 우리 아파트 단지의 온 할머니들이 운동장에 모여 프랑스 샹송을 부르고 있었다. 백발의 할머니들은 서툰 불어 발음으로 그리고 하나 같이 꽃무늬지만 서로 다른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배꼽 아래 손을 모아 샹송을 불렀다.
마음에 남아 나는 일기장에 바로 적어두었다.
잠이 든 도시에 오늘도 각자의 머리맡에 향기가 나는 꿈이 피워지면 좋겠다.
너무나 익숙한 말이지만 사실 참 낭만적이고 예쁜 말.
"잘 자, 좋은 꿈 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