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로 미뤘던 마음을 벗어나
12월은 순수 한글로 매듭달이라 부른다. 마음을 가다듬는 한 해의 끄트머리 달이라는 뜻이다.
겨울이면 마음이 더 선명해지고 넉넉해지는 것 같아 나는 겨울을 높이 산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 눈처럼 쌓여버린 마음을 일순간 깨닫기도 하고, 품 안에 가족들과 나눠 먹을 붕어빵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계절이니까. 매서운 추위가 있는 겨울이라지만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따스함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때때로 연말은 용기와 너그러움을 주기도 한다. 연락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연락하기 힘들었던 사람에게 할 말을 썼다가 지우다가를 반복하다 전송 버튼을 누를 수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 받은 일을 떠올리다가도 즐거운 자리에서 만날 생각을 하니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포용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고, 미안했던 일이 쉬이 떠올라 내년에는 더 잘해줘야지 다짐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떠들썩한 축제 같은 분위기와 피어나는 소망, 로맨틱한 첫눈까지. 나는 겨울을 마다 할 이유가 없는 편이다. 그렇게 겨울에 대한 감상만 깊어지다가 넉넉함이라던지 용기라던지 하는 것들은 왜 봄, 여름, 가을에는 생겨날 수 없는 노릇이었을까 의아해졌다.
마음을 유난히 겨울에 기대었던 걸까. 사실은 겨울이라고 용기가 생긴 게 아니라 꾸준히 겁을 먹다 연말이 된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과 연말에 의지하는 마음의 실체는 12월까지 미루고 미뤄둔 결과였다.
친구 목록을 들여다봤다. 연락의 빈도수와 관계없이 눈에 밟히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보고 싶지만 연락은 못 했는데, 갑자기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너무 이상할까.'
'많이 친해지진 못 했지만 그래도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마음만은 꼭 전하고 싶은데. 역시 이상할까.'
연말을 빌미로 먹은 용기는 스스로에게 쉽게 검열당하고 말았다. 마음을 가다듬는 달이라더니 정말 마음을 가다듬어야만 할 수 있는 연락들이 많구나. 왜 나는 이런 게 어려울까.
"수인아, 잘해 준 사람에게는 정말 잘해줘야 해."
태식이 내게 했던 말 중에 내가 꼭 기억하고 싶은 말이다. 그렇지, 잘 해준 사람에게는 정말 잘해줘야 하는데 왜 쉽지가 않았는지 생각해 보면 나는 속으로 재는 것들이 참 많았고 한 편으론 상대가 이해해주길 바랐다.
진심으로 축하하고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 아주 근사한 선물을 내놓지 않으면 성에 안 차 미뤄진 마음이 있었고, 바쁜 시절을 보내다 한 번 연락을 놓치게 되면 서로가 그렇게 멀어진 사이가 된 걸까 먼저 마음을 내려 두기도 했다. 상대에게 연락이 오겠거니 하면서.
묶어두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싶다. 어느 계절이건 보고 싶으면 그냥 보고 싶어서 연락했다고. 서운한 일이 있으면 사실 그때는 조금 서운했다고, 그때는 여유가 없었다고. 솔직하게 어떠한 때를 기다리지 말고서.
문득 어느 연말에 생각지 못 한 사람에게서 새해 인사를 받게 된 일이 생각났다. 거실 소파에 반쯤은 누워 화려한 연말 티비 프로그램을 보다가 들이닥친 예고 없는 다정함에 나는 즉각 고쳐 앉고는 정성 들인 답장을 보냈었다. 나를 신경 써주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맙고 애정 어린 일이었다. 혹여 갑작스럽고 이상해 보이는 연락을 하게 되어도 나의 상대가 조금은 반가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한 해를 매듭 져 간다. 내년에는 할 일을 미루지 않는 것도 마음을 미루지 않는 것도 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