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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Dec 21. 2019

떡볶이가 좋겠어

친밀한 이 맛


 금주 언니를 만나기로 했다. 언니는 대학에 같이 입학한 동기니까 벌써 7년을 안 격의 없는 사이다. 꽤 오래전부터 잡아 놓은 약속이었다. 별 다른 일 없이 보낸 하루 해가 건조하게 저물고 있었고 나는 딱히 끌리는 메뉴가 없었다. 보통은 전 전날부터 서로가 맛집 블로그 링크를 교환하며 만남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키는데, 둘 다 어쩐 일인지 어디서 만날지 조차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오랜만에 연남동이나 가볼까.' 흔하고 익숙하게 '연남동 맛집'을 검색했다. 아무도 안 볼 때 집에서 혼자 맛집 검색하는 시간을 가끔씩 다행이라 여겼다. 요즘엔 맛있고 근사한 곳들이 많아서 아무렇지 않게 이쯤은 알고 있다고 앞장서고 싶기 때문이었다. 약속 장소에서 만나 길 위에서 생중계로 '00동 맛집'을 검색하자면 낙오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찾아가는데 나만 혼자 찾아가야 하나 봐. 싶은 마음이었다.

  

'으, 날도 춥고 그러긴 너무 싫어. 뭐라도 끌리겠지.' 사진을 쭉쭉 내려본다. 동화책 속에서 볼 법 한 파스텔 톤의 케이크부터 걸쭉한 찌개요리, 토핑이 한가득 올려진 파스타와 피자까지. 10분이 지났을까. 그새 침이 고이다가도 이제 뭘 먹어야 할지 전혀 모르겠는 과부하 상태에 걸리고 말았다. 멋진 인테리어 사진까지 더해져 예쁜 사각형 사진들은 다채로운 방법으로 나를 피로하게 했다.


따뜻한 샤워를 마치고 나니 꽤 괜찮았던 일본 가정식 집이 문득 생각났다. 그저 짧게

 

- 연남동에서 보자, 내게만 맡겨.


라 보냈다. 갑작스러운 나의 리더십에 그녀는 적잖이 놀라고 기대하는 눈치였다. 불맛이 나는 우삼겹에 명란 마요네즈 덮밥이 맛있던 가게, 여전히 맛있어야 할 텐데. 기대하며 잠에 들었다.


다음날, 나는 지하철 문 앞에 서 문이 열릴 때마다 생기는 잠깐의 바람을 붙잡아 가며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속이 계속 메슥거렸다. 집을 나설 때 마신 비타민 알약 크기가 너무 큰 탓이었다. 목구멍에 아직도 커다란 연노랑 비타민이 딱 붙어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 마요네즈 덮밥을 욱여넣다가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입덧하는 사람이 되어 헛구역질을 할 게 분명했다. 벌써 동대문 역사 문화공원, 환승 구간이 되어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아니 분명 수요일이고 평일인데 내 또래가 정말 많다. 다 같이 백수인 걸까. 참 안타까운 형국이야, 싶으면서도 왠지 조금 안심이 된다. 그러다 눈이 어딘가로 꽂혔다. 오리털이 빽빽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보기 드문 아주 통통한 빨간 패딩이었다. 검은 롱 패딩 물결 사이로 그 빠알간 패딩을 입은 누군가의 뒷모습이 화근이었고 아주 확 떡볶이가 생각났다. 그거 잘 됐다.


"언니, 오늘은 떡볶이가 좋겠어. 어때."

"떡볶이는 우주를 구하는 음식이야, 좋아."


그녀는 적극적으로 찬성해주었다. 얼마 만에 먹는 떡볶이야, 만남에 대한 기대가 더욱 고조된 건 이때부터다.


종종 떡볶이를 앞에 두고 나누는 대화는 왠지 맥주를 끼고 대화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술만큼이나 떡볶이는 꽁꽁 숨겨둔 마음이나 긴장감을 해소시키는 솔직한 맛이 있다. 그리고 떡볶이를 먹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나는 왠지 모를 친밀감을 더해 느낀다.


히터 바람으로 빨개진 얼굴로 지하철을 빠져나와 들이키는 공기가 무척이나 신선하다. 3번 출구 앞에서 멀찍이 서있는 금주 언니를 향해 뛰어갔다. 떡볶이 결정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더욱 쉽게 언니에게 안겼다. 언니의 보드라운 양털 재킷은 금방이라도 끌어안고 자고 싶은 인형의 질감이었다. 언니는 내 머리 통수를 안으며 이게 왠 밤톨이여, 하며 웃었다. 숏컷을 하고 처음 만나긴 했다. 우리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수요일 점심시간을 거의 다 지났지만 홍대에서 떡볶이를 먹기란 쉽지 않았다. 웨이팅이 이 세상 웨이팅이 아니었다. 00님 부르면 들어오란 소리는 아니고, 문 앞에 대기하는지를 확인하는 용도였다. 네다섯 명의 여자 그룹이 열한 팀이나 있다니. 어쩌지? 계단 아래에 금주 언니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언니, 한 열몇 팀 있는데 그냥 뭐 일본 가정식 집 이런 거 갈까."

"무슨 소리야. 아까 지하철에서 니가 떡볶이 먹자고 해서 나 침을 다 떡볶이에 맞춰놨단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떡볶이는 생각만으로 특별한 침이 세팅된다. 그래, 언니  생각이 짧았어. 우리는 카페에 들어가 잠시 시간을 때우고 떡볶이집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기 30 전에 서둘러 나왔다. 걸어가는 시간까지 계산했다. 공부를 이런 마음으로 했으면  잘했을 텐데. 찾아 먹고  먹는 것은  시켜도 잘한다며 가끔 푸념하는 엄마의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너 무 마 히 어. 빠 이 머 거."  


언니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나도 윤기가 흐르는 떡을 입에 쏙 넣고는 같이 미간을 찌푸렸다. 맛의 진실은 언제나 미간에 있었다.


떡볶이를 언제 먹었을 때 제일 맛있었나 돌이켜 보면, 가장 친한 친구들, 엄마와 단 둘이 먹을 때였다. 새로운 사람이나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떡볶이를 겸상한 기억이 별로 없다. 있다 하더라도, 떡볶이로 인해 금방 친해졌던 것 같다.


"뭐 먹을래? 나는 떡볶이."


당시 잘 알지 못했던 후배는 답이 정해진 나의 질문에 고개를 조용히 끄덕여주었다. 친해지고 싶을 때 나는 떡볶이를 먹자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새 차 게 매워하고 콧물을 들이키며 선배님 맛있어요. 하던 후배와 나는 밤샘 작업을 이어갔었다.


친밀감이 남다른 떡볶이 때문인지 나는 떡볶이를 먹기로 했을 때부터 각자의 옵션을 알고 있다. 엄마는 언제나 야끼만두 파, 가장 친한 친구는 김말이 파, 아빠는 어묵을 좋아하는 편, 태식이는 케찹 맛, 그때 그 후배는 불고기 토핑 같은 트렌디한 입맛을 가지고 있었다. 떡볶이 우정이 따로 있는 걸까. 다른 음식은 몰라도 이런 것쯤 아는 사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금주 언니는 볶음밥 파였다.


"이거 아주 도른 놈이야."


볶음밥을 먹으며 그녀의 입에서 자주 욕 같지 않은 욕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표현이 없어 나 역시 볶음밥, 아주 미친놈. 이라며 한 술 더 뜨기 바빴다. 완벽한 떡볶이 데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 그 쫀득한 맛을 또 느끼고 싶었다. 나는 컵 떡볶이 하나를 사먹기 위해 태식이에게 전화를 걸어 이천원만 보내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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