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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잊게 하는 물이 있다면

― 어린 시절 읽은 동화에 대한 단상

by 마테호른

어린 시절 읽은 책 가운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가면 저승문 앞에서 저승사자가 물을 준다는 이야기였다.

그 물을 마시면 이승에서의 기억을 모두 잊게 되고,

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동화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그 이야기가 이상할 만큼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기억이 사라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설정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 장면이 유독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누군가는 아무 생각 없이 물을 마시고,

누군가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마시게 되는 장면 말이다.


가끔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뉴스나 방송에서 어린아이가 자신이 전생에 살던 곳을 기억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책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저 아이는 물을 안 마셨나?”


물론 농담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 설정이 너무 또렷하게 남아 있어서인지,

전생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 장면이 떠오른다.


이 이야기를 가끔 아내에게 농담처럼 꺼낼 때가 있다.


“혹시 나중에 우리가 죽어서 저승에 가게 되면, 저승사자가 주는 물은 절대 마시면 안 돼.”


아내는 처음에는 그 이유를 물었다.


“왜?”

“그 물을 마시면 이승의 기억을 다 잊는다잖아. 혹시 다시 태어났는데 나를 몰라보면 안 되잖아.”


그 말에 아내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나는 물을 곱빼기로 마셔야겠다.”


그 말이 너무 단호해서 웃음이 나왔다.

보통 이런 농담에는 조금은 감동적인 대답이 돌아올 것 같은데,

아내는 아주 냉담한 표정으로 물을 두 배로 마시겠다고 말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아마 사람의 기억이라는 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누군가를 평생 기억할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삶이 바뀌면 기억도 자연스럽게 흐려진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시간을 살면서 또 다른 이야기들이 쌓인다.


그래서 어쩌면 저승사자가 주는 물이라는 이야기는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정말 그런 물이 있다면, 나는 마실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기억을 모두 잊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느낌일지 잠시 상상해 본다.


아마도 나는 그 물 앞에서 꽤 오래 망설일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그렇게 쉽게 지워질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지워도 괜찮은 것인지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언젠가 정말 저승문 앞에 서게 된다면,

나는 아내를 한 번쯤 돌아볼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볼 것 같다.


“정말 곱빼기로 마실 거야?”


아마 그때도 아내는 지금처럼 말할 것이다.


“그럼, 두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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