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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연 Dec 26. 2020

추억의 상자 속, 도토리 하나

 꽤 오래 전에 예약해놨던 앨범 몇 개가 며칠 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도착했다. 신나게 앨범 개봉식을 마친 후, 앨범 상자들을 들고 방 안으로 향했지만 앨범을 넣어두려고 한 책장은 이미 만실이었다. 더 이상 보지 않는 책들을 한아름 꺼낸 뒤, 그 자리에 크기도 높이도 제각기인 앨범들을 차례대로 꽂았다. 금방 다시 만실이 된 책장, 그 아래로 갈 곳을 잃은 책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한참을 고민하다 그 책들을 낑낑거리며 거실로 들고 나왔다. 거실 한쪽 구석에 놔둔 이삿짐 상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혼자 살면 좋은 것 중 하나가 생뚱 맞은 곳에 덩그러니 놓인 이 상자에 대해 의문을 가지거나, 치우라고 하는 사람이 ‘나’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는 이 상자를 1년 가까이 방치했다.


 오랜만에 열어본 상자 안에는 담요, 머플러, 인형들 그리고 빨간색 체크무늬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안에 뭘 넣었더라, 궁금함에 자연스레 체크무늬 상자로 손이 향했다. 그렇게 책을 집어넣기로 한 본 목적을 잊은 채, 계획에 없던 추억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상자 안은 반 정도 채워져 있었다.


 노트 귀퉁이를 찢어 만든 쪽지들과 손바닥 크기의 포스트잇 메모들. 생일축하 메시지가 적힌 알록달록한 카드들. 저 멀리 해외에서 날아온 국제편지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주신 용돈이 담겨 있던 봉투. 하굣길 버스 탈 때 쓰던 티머니 카드. 고등학교 3년간 썼던 흰색 PMP. 대학시절 매년 한 권씩 써내려갔던 다이어리들. 국내외 전시회를 돌며 모았던 그림 엽서들. 한때 좋아했던 연예인의 팬클럽 멤버십 카드와 각종 굿즈들. 그리고 도토리 하나.


 반지 보관용으로 받은 벨벳 파우치 안에서, 반지는 없고 별안간 도토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서울에서 이사 내려올 때 깨지지 말라고 파우치를 찾아 도토리를 넣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 때 비싼 옷이나 물건들은 미련 없이 버리고 왔으면서, 꾸역꾸역 이 도토리를 챙겨왔다는 사실에 혼자서 한참을 웃었다. 그러고 나니 이 상자에 물건을 넣을 때 했던 질문들도 떠올랐다. 얼마 주고 샀었지? 앞으로도 계속 쓸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언젠가 떠올리고 싶은 순간이야?


 들쑥날쑥 대충 찢은 종이 위로 쓰인 글을 읽다보면 독서실 칸막이 너머로 쪽지를 던져주던 친구들이 생각나 그립다. 한 살, 한 살 숫자가 늘어가는 생일축하 카드들을 보면, 그 긴 세월 변치 않고 내 곁에 있어준 사람들이 많았음에 감사해진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어느 먼 나라의 주소가 적힌 편지들을 보면 그 곳에서도 나를 잊지 않은 친구들이 생각난다. 그 편지가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보낸 사람도 받는 사람도 둘 다 잘 갔을까, 언제 도착할까 궁금해하며 두근거려했던, 그 순간도 함께.


 용돈이 담겼던 흰 봉투는, 나는 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큰 사람임을 깨닫게 해줘 코끝이 찡해진다. 손때가 묻은 티머니 카드를 만지작거리면 친구들과 떡볶이 한 컵 해치우고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가던 나의 하굣길이 떠오른다. 흰색 PMP를 보면 기숙사 룸메이트들과 함께 옹기종이 붙어 숨을 참고 공포영화를 보던 순간이 생각난다.


 빽빽하게 일정이 적힌 다이어리를 보면 아등바등 참 치열하게도 살아온 대학시절의 내가 떠올라 토닥거려주고 싶다. 여기저기 전시회를 돌며 모아온 그림엽서들을 보면서 한결 같은 내 취향에 놀라고, 조금씩 사 모았던 아이돌 굿즈를 보면 아빠 다음으로 좋아했던 한때의 ‘울 오빠’가 떠올라 마음이 몽글해진다. 파우치 안에서 바짝 말라버린 도토리를 보자, 등산가방에서 큰딸 선물이라며 꺼내 보이던 아빠의 개구장이 같은 얼굴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난다.


 상자 안에 있던 물건들을 다 꺼내어 하나씩 살펴보고 나니, 땅거미가 지던 창밖이 깜깜해졌다. 시간으로 보니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거실에 잔뜩 늘어놓은 물건들을 다시 상자 안에 넣으면서, 누구나 이런 상자 하나쯤 가지고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 안에는 물건이 담겨있지만 그 사람에겐 그건 물건이 아니라 기억이고 추억이고 마음이겠구나 싶었다. 나의 추억의 상자가 그런 것처럼. 대부분의 시간, 그런 추억의 상자는 먼지가 소복 쌓인 채 어딘가에 조용히 놓여 있을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문득, 어쩌다 그 상자를 열면 소중한 ‘그 때’가 생생하게 펼쳐질 것이다. 결국 추억은 늘 재생되기 바라는 음악 같다. 잠시 일지정지하고 있을 뿐. 우리는 그저 재생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상자를 다 정리했을 무렵, 문득 언젠가부터 이 상자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는 걸 깨닫았다. 황급히 집안을 둘러보다 서랍 안에 넣어둔 액자 하나를 찾아왔다. 회사 동기들과 입사식 시작 전에 다같이 모여 찍은 사진이 들어있었다. 매일 회사에서 보는 지겨운 얼굴들인데 지금보다 한참 앳된 모습을 보니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반가웠다. 걱정보단 설렘이 더 컸던 그 날의 웃음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언젠가 또 틀어보고 싶은 추억 하나를 상자에 넣은 뒤, 잊고 있던 책들도 마저 정리해서 넣었다. 추억들로 북적이던 거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한 겨울의 크리스마스 캐롤처럼, 매년 꺼내서 듣고 싶은 노래들이었다.




“On these lonely nights

Going back in time

Playin’ your mixtape

Turn it up for one last time eeh oh

It’s these lonely nights

Rolling down the memory lane

It made me turn it up for one last time

And listen on repeat”

- Bloome <Mixtape(On Rep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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