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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연 Jan 17. 2021

인생이 항상 시트콤은 아니겠지만

 동생이랑 함께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의 일이다. 동생은 컨디션 난조로 숙소에서 쉬기로 했고, 나 혼자 원래 계획했던 근교를 다녀오기로 했다. 혼자서 지역 열차와 산악 열차를 번갈아 타면서 몬세라트에 도착했다. 혼자서 조용한 수도원을 구경하는 일이란 꽤 심심한 일이기도 했고,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기념품과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조금 서둘러 하행 산악 열차에 올라탔다. 열차 밖을 보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열차가 멈추곤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나는 그 무리를 쫓아 따라 내렸다. 그리곤 바로 앞에 있던 간식 자판기에 온 신경이 팔렸다. 다른 사람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지도 못한 채, 자판기 버튼을 신나게 눌렀다. 뒤에선 열차가 다시 출발하는 소리가, 앞에선 과자가 자판기에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온 주변이 조용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 혼자만 그 역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1유로짜리 땅콩과자를 손에 쥔 채.


 급하게 휴대폰으로 찾아보니 이 역은 중간역으로, 단체버스나 자동차로 온 사람들이 중간에 산악 열차로 갈아타는 역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같이 따라 내렸던 그 무리는 단체 관광객인 모양이었다. 다음 번 하행 산악열차는 대충 잡아도 1시간 후. 남은 일정이 모조리 엉킨 상황에서 혼자 플랫폼 의자에 앉아 땅콩을 씹어 먹고 있으니 황당함에 웃음이 났다. 이놈의 땅콩이 뭐라고! 이것만 안 샀으면 됐는데! 그렇게 혼자 30분 정도 앉아 있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청소부 아저씨 한 분이 날 발견하곤 말을 거셨다. 열차를 기다리냐, 올라가는 거 아님 내려가는 거? 뉘앙스로 대충 알아듣곤 하행 열차를 기다린다는 걸 열심히 전달했다.


 그 후 아저씨는 상행 열차가 오면 심각한 표정과 X자 손 모양으로 타면 안 된다고 알려주셨다. 상행 열차를 몇 대 더 보낸 뒤, 마침내 기다리던 하행 열차가 도착했다. 아저씨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시며 머리 위로 O자를 만들었다. “Gracias!”를 연신 외치며 열차에 올라탔고 아저씨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창밖으로 지나갔다.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서울에 있던 친구에게서 보이스톡이 걸려왔다. 당혹스럽고 황당했지만 한편으론 웃겼던 그 1시간 동안의 상황을 풀어놓자, 친구는 호탕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라도 웃을 일이 생기는 게 얼마나 좋냐”


 그 뒤로 스스로가 봐도 멍청한 일을 했을 때면 이상하게 그때가 떠올라 짜증이 나다 가도 금세 피식 웃음이 난다. 얼마 전에도 그때의 일이 떠올라 웃었다. 그 날은 업무 마감일로 아주 정신이 없던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사무실 뒤편으로 비상계단이 있는데 나갈 때는 사원증이 필요 없지만, 사무실로 되돌아올 때는 사원증 없이는 꼼짝없이 갇히게 되는 구조이다. 종종 사원증을 두고 다녀서 그렇게 비상계단에 갇히는 직원들이 있다. 그래도 대부분 휴대폰으로 해당 층에 있는 직원을 불러 문을 열어 달라고 하면 되니 큰 문제는 없다. 그날도 동기 두 명이 거의 30분 간격으로 비상계단에 갇혀 있다고 전화를 했다. 비상계단에서 그들을 구조해주면서, 사원증 좀 제대로 하고 다니라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 답답해서 비상계단으로 향한 나는 그곳에 갇히고 말았다. 사원증도 휴대폰도 없이.


 당일 중으로 보내야 하는 등기우편을 손에 쥔 채.


 사원증을 빼놓고 와서 허전해진 목덜미와 아무것도 없는 호주머니를 번갈아 만지작거리자 비상계단에 갇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동기에게 한 잔소리가 무색하게, 아무런 대책 없이 계단에 갇혔다는 점에 웃음이 났다. 손에 쥔 등기우편은 마치 그때의 땅콩과자 같았다. 어딘가에서 그때처럼 청소부 아저씨가 나타나길 바라는 심정으로, 사무실 쪽 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그렇게 20분 정도 두드렸을까, 누군가 그 문을 열었다. 오전에 내가 구해준 동기 중 한 명이 그 문 밖에 서 있었다. 서로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본 놀람도 잠시, 동시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진짜 웃긴다.”

 “그러게 진짜 웃긴다.”


 땅콩과자 때문에 열차를 놓친 일이나, 비상계단에 갇혀 꺼내 달라고 문을 두드렸던 일. 그런 일들은 앞으로도 종종 생각날 듯하다. 인생이 항상 시트콤은 아니겠지만, 가끔은 이런 일도 괜찮지 않을까. 짜증 낼 바엔 그냥 호탕하게 한바탕 웃고 넘겨보자. 이렇게 해서라도 웃을 일이 생기는 게 얼마나 좋은가!




“Freaked out

Dropped my phone in the pool again

Checked out of my room, hit the ATM

Let’s hang out

If you’re down to get down tonight

Cause it’s always a good time”

- Owl City <Good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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