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도 나름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은 바로 할아버지였다. 모서리가 누렇게 변해 돌돌 말린, 빛바랜 오래된 사진에서 나는 냄새. 그 냄새가 바로 시간이 남긴 흔적이라고 하셨다. 어린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할아버지를 따라 연신 사진들을 킁킁 맡아대곤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난 가끔 튀어나오는 상자 속 옛날 사진들을 마주할 때면 냄새부터 맡곤 한다. 이렇게 할아버지는 내게 조금은 특별한 습관들을 만들어주셨다. 할아버지가 그리운 이 밤, 그 습관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자연스레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하교를 하면 으레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고, 대문 앞에 세워진 할아버지의 남색 지프차를 보면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TV를 보다 지겨울 때면 나는 할아버지를 졸라 드라이브에 나섰다. 할아버지는 나를 조수석에 태우고는 그 지프차로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그때 내겐 그 지프차야말로 세상에서 제일로 크고 멋있는 차였다. 어른이 된 지금도, 크고 멋있는 차를 떠올리라하면 그때의 지프차를 머릿속에 그린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그 차를 몰고 학교 앞까지 마중을 나오신 적이 있었다. 그 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이라는 걸 받아본 날이었다.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공책 크기로 반듯하게 접은 상장 종이를 꺼내, 할아버지께 처음 보여드렸다. 무슨 상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할아버지의 웃음소리만큼은 생생하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근처 중국집으로 데려가주셨고 둘이서 다 먹지도 못할 만큼 큰 탕수육을 시켰다. 저녁을 먹기는 조금 이른 어느 날의 오후였고, 그 날은 어린 나에게 "기쁜 날 = 탕수육을 먹는 날"이라는 공식이 성립된 날이었다. 이후 우리 집은 내게 기쁜 일이 생겼을 때는 무조건 탕수육을 시키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사준 그날을 생각하면서.
사진, 지프차, 탕수육. 그 외에도 많은 것이 있지만, 유독 이 밤에 기억나는 게 하나가 있다. 바로 바람을 따라 불어온 담배 냄새. 애연가였던 할아버지는 항상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었다. 걸음걸이가 빠른 할아버지 뒤를 따라 걷노라면 할아버지가 지나간 자리에 작은 바람이 불어 담배 냄새를 실어다 주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그 냄새를 할아버지 냄새라고 쫑알거리며 좋아했었다. 그런 희미한 담배 향이 나던, 내가 참 좋아하던, 할아버지는 내가 대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곁을 떠나셨다. 생전 좋아하시던 담배처럼 홀연히 연기와 재가 되어.
할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허망했다. 할아버지의 유품이 담긴 네모난 우체국 박스를 다 치우고 나니 할아버지의 흔적이 아무것도 없는 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디에서도 할아버지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허망했고 슬펐다. 그러다가 하루는 바람 따라 불어온 담배 냄새에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환하게 웃는 할아버지를 떠올리자 많은 기억들이 따라왔다. 사진, 지프차, 탕수육, 담배 냄새……. 그 날부터 조금씩 슬픔을 그리움으로 바꿔나갔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린 나와 젊은 할아버지의 투 샷이 찍힌 사진도 이제 시간의 냄새가 물씬 날 만큼 노오랗게 빛이 바랬다. 그 사이, 나는 벌써 대학교를 졸업하고 평범하게 하루하루 출근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할아버지가 만들어주고 가신 조금 특별한 습관들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기쁜 일이 생기면 탕수육을 시켜먹고, 언젠가 남색 지프차를 타고 출퇴근 하고 싶다. 오래된 사진을 보면 냄새부터 맡고, 희미한 담배 냄새가 바람 따라 불어오면 고갤 들어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보이지 않는 습관들이지만 나에게는 할아버지를 느낄 수 있는 흔적이고 그리움이며, 추억이다.
누군가가 무척 보고 싶은 이 밤, 그 사람의 흔적이 당신에게 남아있기를 바라며.
이 밤, 바람에 희미한 담배 냄새가 불어오지 않을까 살짝 창문을 열어본다.
“어떤 날엔 그런 날 있어
무엇인지 모를 낯선
어떤 향기로부터 어떤 날엔 소리로부터
아주 오래된 기억을 느껴”
- 백예린 <아주 오래된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