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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준 May 31. 2020

축구대회가 저변을 넓힐 수 있었던 이유

축구대회 FA컵은 초창기 축구 규칙 정립에 기여했다.

규칙을 갖춘 축구는 다른 지역 팀끼리 경기해도 판정 시비가 없는 '호환성'을 갖추게 됐다.

FA컵 대회 이후 축구 저변이 확대되는 이유다.




잉글랜드는 1871-72년 FA컵을 통해 축구 규칙을 통합했고 축구 저변도 확대됐다. FA컵 인기가 커지면서 돈을 받고 경기에 뛰는 직업 축구선수가 생겼고 직업선수팀이 맞붙는 프로리그 풋볼리그(1888-89)도 탄생했다.




한국도 그랬다. 1921년 2월 국내 첫 공식 대회 전조선축구대회를 필두로 국내 각지에서 축구대회가 열렸다. 1921년 3월 인천에서 열린 축구대회가 1천여 관중이 모인 가운데 성황을 이뤘다. 같은 해 5월 평양 YMCA 창설 전국축구대회 1922년 6월 제 1회 황해도 축구대회 8월 함경도 청진 북선 축구대회 등이 잇따라 열렸다. 


1936년 4월 조선중앙일보는 제 1회 도시대항전을 개최했고 10팀(경성 평양 함흥 원산 마산 군산 안악 진남포 순천 제주)이 참가한다. 도시대항전을 통해 전국에서 통일된 규칙으로 축구를 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축구원로 박경호는 1938년을 한국 축구 최고 전성기로 꼽는다. 당시 뜨거운 축구 열기 속에서 시골 축구대회를 찾아다니는 축구선수가 꽤 많았다고 한다. 군(君) 단위 경기에 돈을 주고 선수를 뛰게 하는 식이었다. 돈을 주고 선수가 뛰는 건 논란이 있었지만 다른 지역 팀도 같은 방식이었다. 우승하면 군 전체가 잔치를 벌일 정도로 축구 열기가 뜨거웠다고 한다.




전조선축구대회는 한국 축구가 자리잡는 중심 축으로 기능한 대회였다. 대회를 통해 규칙이 자리잡았고 저변이 확대됐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돈을 받고 대회에서 뛰는 선수도 나타났다. 꽤 많았다는 시골 대회 축구선수들은 한국에도 직업 축구선수가 태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탄생 배경과 같은 흐름이다. 


다만 한국 축구는 잉글랜드처럼 프로리그를 만들지는 못했다. 1938년 이후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1941년) 암살이 일상이던 해방정국(1945년) 혼란스러운 한국전쟁(1950년) 등 굴곡진 현대사를 겪은 탓이다. 한국 프로축구리그는 1983년 전두환 정권이 '슈퍼리그'를 만든 후 지금에 이른다. 한국 현대사가 '비극의 역사'가 아니었다면 한국 축구는 어쩌면 역사가 더욱 긴 프로리그를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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