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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준 May 30. 2020

한국은 언제부터 축구를 했을까?


월드컵 축구 경기가 있으면 전국민이 '대~한민국'을 외친다. 우리가 당연하게 응원하는 축구는 '근대 수입품'이다. 대한축구협회 한국축구 100년사에 따르면 1882년 6월(고종 19년)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 호 승무원이 인천항을 통해 축구를 처음 보급했다. 축구는 빠르게 퍼져나갔다. 13년 지난 1895년 5월 서울 관립 외국어학교 출신들이 모여 대한척구구락부를 만든다. 1902년에는 배재학당 축구반이 생겼다. 1904년 황성기독청년회가 운동부를 꾸린다. 1905년 배재고보 운동장에 정식으로 '골대'가 세워졌다.


1905년 6월 10일 훈련원(옛 동대문운동장 현 DDP)에서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가 축구 시합을 했다. 축구 도입 23년만에 최초로 '공개 축구경기'가 있었다. 빠르게 확산 중이던 축구는 일제가 보안법을 공포한 1907년부터 위축된다. 축구 경기에 모이는 사람이 보안법 집회 금지와 상충하기 때문이었다. 




보안법이 축구 열기를 없애지는 못했다. 1920년 문화통치 전환 후 국내에서 첫 축구대회가 열린다. 1921년 2월 조선체육회 주관 제 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개최됐다. 대회는 2월 11일 막을 올렸다. '규칙'을 적용한 국내 첫 축구대회였다. 대회는 일본 아사히신문사가 발행한 운동 연감 축구경기규칙을 번역해 적용했다. 


왜 하필 추운 날씨인 2월에 대회가 열렸을까? 축구원로 박경호는 "전조선대회는 3·1운동에 힘입어 힘을 통해 민족자존을 지켜질 수 있다는 자각 속에서 열렸다. 당시 축구인들은 일제 간섭없이 한국인(조선인)만의 축구대회가 열린다는 흥분이 가득했다"고 회고한다. 이왕 대회를 개최할거면 빨리 개최하자는 여론이 2월 대회를 만들었다. 일제가 억눌렀던 축구 열기가 어땠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소 성급했던 개최로 대회 원년 우승팀은 없다. 심판 판정 불만 때문이다. 대회에 앞서 참가팀에 경기규칙서를 배포하고 규칙 해설까지 했지만 참가팀이 단기간에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전조선축구대회는 대회 강령 심판규정 등을 정립하며 다음해 2회 대회부터 온전히 자리 잡는다. 2회 대회에서 평양무오단이 우승을 차지한다. 우승팀을 가려내지 못한 1회 대회가 못내 아쉬웠는지 같은 해 대회를 한 번 더 개최한다. 3회 대회에서는 불교청년회가 우승을 차지했다.


전조선축구대회 첫 우승을 차지한 평양무오축구단. 창단 원년인 1918년 무오년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전조선축구대회 3회 대회 우승을 차지한 불교청년회. 평양무오축구단과 라이벌 관계였다.



한국 FA컵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부터 열린 전조선축구대회를 전신으로 한다.


한국축구 FA컵은 전조선축구대회가 뿌리다.


FA컵 대회는 잉글랜드가 처음 만들었다. 잉글랜드 FA컵은 '축구 규칙 확립'에 기여한 대회였다. 전조선축구대회도 그랬다. 우승팀을 가리지 못한 결과는 대회가 축구 규칙 확립에 기여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회 대회를 겪으며 대회 강령, 심판 규칙을 정비했고 다음 해 부터 대회가 안착했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 FA컵 대회 뿌리를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찾는 이유다.

한국축구는 1921년부터 공식 대회를 개최해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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