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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준 Mar 23. 2020

민족화가 이쾌대, 민족의 자화상

주말 오후, 슬리퍼를 끌고 털레털레 동네 슈퍼마켓에 갔다. 

집에 TV가 없는지라, 가끔 슈퍼에 켜놓은 TV를 볼 때가 있다.

"어, 저 그림?"


낯익은 작품, 'tvN 신기한 미술나라'에 나온 이쾌대 작품이었다.

이쾌대.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그는 '조선의 미켈란젤로'란 별칭이 붙은, 한국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15년 10월 즈음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이쾌대 관련 전시를 하고 있었다.

퇴근 후 여가를 즐기기 위해 들렀던 덕수궁, 우연한 만남이었다.

특이한 이름이 눈길을 끌었고, 작품들은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다. 파리를 여행하던 중에도, '반드시'가야 한다는 유명 미술관을 거르고 센강에서 라임 스쿠터를 탔었다. 그런 내가 몰입하며 봤던,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전시가 덕수궁에서 만난 이쾌대 전시였다.



카드놀이하는 부부(1930년대 추정)
무희의 휴식(1937)
<신여성> 잡지(1936)
군상 1-해방 고지(1948)
군상 4(1948년 추정)




이쾌대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만삭이었던 부인과 서울에 머물렀고,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강요로 종군화가로 활동해야 했다. 연합군 서울 수복 후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했다. 다음은 수용소에 갇혀 있던 당시 부인에게 부친 편지 내용 중 일부다.


“아껴 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맘은 지금 안방에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이쾌대와 부인 유갑봉은 고등학생 시절 만나 연을 맺었다. 첫눈에 반한 이쾌대가 구애 끝에 부인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일본 유학길에 함께 올랐고, 부인을 모델로 많은 작품을 그렸다. '카드놀이하는 부부'는 유학 당시 자신들 모습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그는, 포로교환 당시 북한을 택한다. 북을 택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분단 고착화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추측이 나온다.


월북화가. 집 주변으로 사복경찰이 맴돌았고, 유갑봉 여사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림은커녕 이쾌대라는 이름조차 언급하기 힘든 시대였다. 그림을 팔라는 수집가들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압수를 우려해 그림을 신문지로 꽁꽁 싸매 다락방에 숨겨두었다. 유갑봉 여사는 포목점을 운영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1988년 해금 이후, 그림이 세상에 나왔다. 부인과 자식들이 30년 넘게 지켜낸 그림이었다. 


그림이 다시 빛을 보았을 때, 유갑봉 여사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림은 남편과 못다 나눈 사랑이었고, 남편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평생에 걸쳐 한 여인이 품어야 했던 한(恨)이었다. 그런 시대였다.





"응? 형인데 이름이 여성이네?"


2015년 전시에서 형 이름이 유독 눈에 띄었다. 여성은 호다. 본명은 이명건.


형 여성은 학자, 기자, 독립운동가였다. 대구에서 3·1 운동에 가담했고, 이로 인해 3년 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역임했고, 당시 통계를 총망라한 <숫자조선연구>, <애란민족운동>, <약소민족운동의 전망> 등을 집필했다. 1936년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돼 해직된다. 이후 복식(服飾) 연구에 몰두, 1946년 <조선복식고>를 펴냈다. 조선복식고는 지금도 복식사·미술사 연구에 꼭 필요한 자료로 꼽힌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문화부장 및 선전부장을 맡았던 여성은 몽양 여운형 암살 후 1948년 남북협상에 참가했고, 북에 남는다. 동생 이쾌대가 포로교환 당시 북을 선택한 이유로 형 이여성이 영향을 끼쳤을 거란 추측도 함께 나온다.




여성(如星). '별처럼'이란 뜻이다.


경성 중앙학교 재학 중 뜻을 함께한 친구들과 '산처럼, 물처럼, 별처럼 살겠다'는 마음으로 호를 지었다. 

셋 고향은 칠곡, 부산 동래, 밀양이었다. 동향이었던 배경이 친해진 계기가 아니었을까?

뜻을 함께한 친구들 호는 약산(若山, 산처럼)과 약수(若水, 물처럼), 이름은 김원봉(약산), 김두전(약수)이다.


약산 김원봉. 배우 조승우가 암살에서 연기했던, 우리가 아는 그 김원봉이다. 

약수 김두전은 대한민국 초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앞장서다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 투옥된다. 


세 친구 모두 생애 마지막을 북에서 맞았다. 약산 김원봉은 여성과 함께 1948년 남북협상 이후 북에 머물렀고, 투옥 중이던 초대 국회부의장, 약수 김두전도 한국전쟁 때 풀려나 친구들이 있던 북으로 갔다.

고향 땅을 등지고 북으로 향했던 이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세 친구 중 한국사회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이는 약산 김원봉이다. 작년에는 독립운동가 활동을 고려해 서훈해야 한다는 주장과 북한 정권수립에 기여했으므로 서훈할 수 없다는 주장이 대립했었다. 대립하는 사실과 사실, 그 위를 이념이라는 게 덮고 있다.


조선의 미켈란젤로 이쾌대, 형이었던 여성과 형 친구들 약산과 약수까지.

이념의 장막을 거두니, 사람이 보였다.



이쾌대
1945년 8월 16일 휘문중 교정에 들어서는 (좌측부터) 이상백, 몽양 여운형, 이여성(출처 : http://www.newsmin.co.kr/news/42314/)
(좌) 이여성 초상, (우) 자화상.
이여성의 가족들 (책 이쾌대, 출처 : http://www.newsmin.co.kr/news/42314/)

산처럼, 물처럼, 별처럼.


왼쪽부터 약산 김원봉, 약수 김두전, 여성 이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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