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책에서 핵심 가치라는 것을 읽게 되었고, 나는 나의 가치 다섯가지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다.
그리고 잠깐의 고민도 없이 떠오른 단어들 행복, 주체, 책임, 실패.
그리고 마지막 단어 하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떠오르긴 했지만 그것이 정말 나의 가치가 맞는가 질문하면 쉬이 그렇다라고 할 만큼의 무게는 아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불현듯 떠오른 경험이라는 가치.
이렇게 나의 가치는 행복, 주체, 책임, 실패, 경험이라는 단어로 정의 되었다.
나는 삶을 살아가며 행복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 어떠한 것을 선택할때 이것을 하는 나는 행복한가, 이것을 할 아이는 행복할까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러한 행복을 추구했지만 당시의 행복이 유희에 의한 행복으로 한정 되었다면 나이가 들어 느끼는 행복은 편안함과 흥미로 더욱 확장된 것 같다.
삶의 본질을 떠올려 보면, 나는 왜 살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떠올리면 결국은 행복이라는 결말에 다다른다.
나는 인생을 늘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주도적이라 타인이 나의 결정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고 침범을 하려하면 날이 서고 예민해지는 것과 같이 단점도 있지만, 이러한 주체성이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굉장히 능동적이고 주도적이며 주체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방해받을 때면 분노를 느끼고, 이 또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표현하고 개척해 내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적인 삶은 책임이라는 이름과 일맥상통한다. 내가 선택한 것에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책임감이 투철한 (혹은 과도한) 내게 있어 주체적 삶은 자연스레 따라온 결과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책임을 매우 중시하며 아이에게도 선택에 따른, 행동에 따른 책임을 자주 요구하곤 하는데 그것이 지나칠 때면 아이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것 같아 자주 뜨끔 하기도 한다.
내가 동경하고 또 존경하는 이들은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 실패자들이다.
실패란 결국 성공으로 가는 과정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필연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실패에 좀 더 초연하며 실패한 상황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고 실패자인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패가 쌓이면 쌓일 수록, 실패가 거듭될 수록, 고도의 실패자일 수록 나는 더욱 값지고 빛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경외심을 느낀다.
또한 실패와도 연결되는 이야기이지만 무엇이든 경험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사소한 경험도 경험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 안에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어느 순간에 어떻게 발현될지 모르는 잠재력을 지닌다.
나는 물욕이 없다. 하지만 굉장한 가치투자자라 생각한다.
평소 몰골이라 칭할 만큼, 다 떨어진 가방을 매고 화장기없는 얼굴에 락스로 인해 군데군데 변색된 츄리닝을 교복처럼 입고 다니며 외적인 것에 크게 돈을 쓰지 않지만 경험하고 보고 느낄 수 있다면 투자를 아끼지 않는 편이고, 그것들은 내 안의 가치가 되어 언제 쓰여질지 반짝 반짝 빛을 내고 있다. 아니, 이미 많은 일상에 쓰임이 되고 있을지도.
아무것도 헛된 것은 없고, 모든 경험은 잠재력으로 쌓여 간다.
종종 나는 나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곤 했다.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하고, 오지라퍼같은 모습을 보일 때면 왜? 라는 의문이 들었었다.
그리고 나의 가치들을 돌아보니 주체적이고 책임감이 높은 나의 가치들에 따라 나타난 자연스런 행동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나의 가치들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36년을 살며 켜켜이 쌓이고 강화되어 온 것들이고 나의 신념과 인생과 환경이 모두 응축되어 있는 가치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가치를 지향하며 살아가고 그것들은 삶의 태도로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한다.
(하나 더 가치를 추가한다면 나는 '선'을 추구하고 싶다. 하지만 내 안엔 악도 너무나 많아.)
그리고 원시티가 별이 되었던 순간 전 즈음부터 나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수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죽음이 왜 두려운 걸까.
정말 일차원적으로 죽음의 고통이 두려운 걸까.
물론 고통 역시 두렵지만 사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비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랑하는 이를 다시는 볼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책에서 우주 탐사를 떠나는 친구와 다시는 볼 수 없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친구를 떠나 보냈는데 며칠 후 우주선을 타고 가다 폭발사고로 죽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슬퍼했다는 가설을 보았던 것 같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은 똑같지만 대상이 어딘가에 존재하거나 혹은 비존재하거나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고통에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결국 존재 자체보다도 중요한 것은 의미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또 정립해 나가며 결론은 유한한 생명 앞에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남길 수 있는 것은 나의 가치와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야 자신의 신념을 죽음과 맞바꾼 소크라테스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나는 과연 나의 핵심가치를 위해 죽음을 택할 수 있을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죽음으로서 자신이 따르는 가치를 대변했고 자신의 목숨으로서 그것을 증명했다.
여전히 내가 찾은 것이 인생의 진리인건지 혹은 개똥 철학인지 모르겠다.
어쨋든 나는 (어쩌면 목숨보다 위대할지도 모를) 가치를, 신념을,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