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웨이>의 작가는 자신의 창조성을 감춘 채 살아가는 그림자 아티스트들에게 용기를 내서 아티스트의 영역으로 넘어오라고 말한다. ‘아티스트’라는 말이 아무래도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창조적 욕구를 발휘하는 사람과 발휘하지 않는 사람 사이의 문턱은 그리 높지 않으며 고무줄놀이하듯 넘나드는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 문턱을 넘기를 힘겨워하는 내가 보인다. 그 장면이 마치 말뚝에 발목이 묶인 채 성장했기 때문에 힘이 세진 후에도 말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코끼리를 보는 것 마냥 애처롭다. 내 발목을 묶고 있는 말뚝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장면 하나, A 曰 “그런 거 하지 마. 소용없어.”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합창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어떤 과정으로 합창부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빠 차 안을 종종 노래방으로 만들어 버리곤 하던 내가 합창부에 들어간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합창은 정말 재밌는 것이었다. 나는 알토 파트를 맡았는데, 공들여서 내보낸 나의 소리와 호흡이 다른 이들의 것과 조화를 이룰 때의 짜릿함을 그 어린 나이에도 느낄 수 있었다. 합창부를 종종 지도해 주시던 외부 선생님이 계셨다. 어느 날은 본인이 이끄는 합창단의 새로운 단원을 뽑는다는 홍보를 하셨는데 그 말을 듣자 호기심이 새싹을 틔웠다. 그 새싹은 며칠간 내 안에서 싱그럽게 자라났다. 내 마음도 그 새싹의 초록빛에 서서히 물들어갈 때 무렵이었다. 나는 초록빛 목소리로 “이런 오디션이 있는데, 나 한 번 참가해 볼까?”라고 A에게 말했다. A는 “그런 거 하지 마. 소용없어.”라고 대답했다. A는 또 다른 현실적인 이유를 덧붙였던 것 같다. 왜 좀 더 자기주장을 하지 않았을까. 글쎄. 나는 소심한 아이였고, 현실적인 ‘결과’를 고려하는 A의 똑똑함 앞에 비춰본 나는 한없이 작고 어리석어 보였던 것이다.
장면 둘, B 曰 “이 아이들은 자라면 너희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될 거야.”
어린 학생들이 모여있는 교실 안이었다. 그 공간의 리더 역할을 맡은 B는 몇몇 아이들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리곤 “내 눈에는 지금부터 될성부른 나무가 보인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 특별한 존재가 될 거야.”라고 말했다. B는 자신의 통찰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그 공간에 있던 아이들은 B의 통찰력을 감탄하기보단 ‘뛰어난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구별하고 있는’ B의 속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뛰어난 아이로 구별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실체는 독이 든 사과였다. 순수한 백설 공주의 본성을 닮았던 내 마음은 그 사과를 의심 없이 먹었고, 사과의 독은 교묘하게도 내 안의 우월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 우월의식은 생각보다 참 지독한 것이더라. 타인의 가능성이나 장점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물론, 내가 나를 칭찬하고 격려하려고 할 때 ‘호들갑 떨지 마. 그 정도는 당연한 거야’라고 냉랭하게 말했다. 고백하건대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다는 것, 내가 ‘다른 사람만큼’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나는 마음 한쪽에 이 지독한 것을 계속 품고 살아왔다.
장면 셋, C 曰 “내 주위에 그 학과 간 사람들 있는데, 결국 전공도 못 살리고 겨우 이런 데 취업하더라”
19세와 20세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거라고 믿던 시절이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좀 더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구체적 경험의 기록이 아닌 가능성의 형태로만 존재했다. 얼굴에 분홍빛을 띠고 가능성을 톡톡 건드려보려는 찰나, 또다시 엄격한 말이 들렸다. “내 주위에 그 학과 간 사람들 있는데, 결국 전공도 못 살리고 겨우 이런 데 취업하더라.” 내가 그 분야에 적성이 잘 맞는다는 타당한 증거를 댈 수 없었다. 그 학과를 졸업한 뒤 어떤 직업을 갖겠다는 포부도 없었다. 특정 분야에 대한 선택의 이유는 흥미, 가능성의 형태로만 존재했으니까. 어느 정도의 위험을 동반하는 주체적인 선택을 해본 경험이 없는 어린 소녀의 주관은 외부 요인에 의해 ‘적절한 것’으로 쉽게 변형되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는 A, B, C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 세 사람은 모두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때의 그들과 지금의 그들은 다른 사람일 것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했을 그들을 악당으로 규정하고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지치고 상처받았을 나를 보듬는 일이다. 이슬아 작가는 그녀의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반짝반짝한 아이들에게 “너는 커서 네가 될 거야. 아마도 최대한의 너일 거야.”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이 말을 나에게도 따뜻하게 건네고 싶다. “좀 더 강단 있게 꿈을 좇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을 자책할 필요는 없어. 나의 창조적 자아는 생각보다 유연하고 또 강하거든. 이러한 창조적 자아를 가진 나는 커서 내가 될 거고, 아마도 최대한의 나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