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7세, 속사포 구연동화를 시전하다.
학교 입학 전이니 아마 7살 때로 추정한다. 어렸을 때 나는 참 다양한 과외활동을 했는데, 구연동화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구연동화 학원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기억은 내 양 볼을 빨갛고 뜨끈하게 만들었던 낯선 교실, 아이들이 수업을 받는 동안 창가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학부모들, 엄마가 창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던 나의 모습이다.
7세의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엄마는 나에게 두렵고도 달콤한 제안을 했다. “너 크리스마스날 교회에서 구연동화 발표하면, 엄마가 웨딩피치 선물 세트 사줄게.” 웨딩피치 선물 세트라니. 웨딩피치는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였고, 웨딩피치의 선물 세트의 구성은 옷을 갈아입힐 수 있는 웨딩피치 인형, 평범한 소녀가 웨딩피치로 변신할 때 사용하는 뚜껑 달린 장난감, 만화책, 만화 비디오테이프였다. 그것은 완전한 선물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혼자 발표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두려운 일이었지만, 완전한 선물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욕구가 그 두려움을 이겼다.
크리스마스 당일, 무대의 오르기 전 나의 마음은 번지점프대 앞에 서서 ‘눈 딱 감고 한 번 뛰어보자’하는 익스트림 스포츠 초심자의 그것이었다. 나는 눈을 꼭 감은 채로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과 속도로 구연동화를 시전하였다. 동화 구연을 마친 뒤 눈을 떴을 땐, ‘이건 뭐지?’하는 관객들의 표정, 잠깐의 정적, 그리고 몇 초 후 박수가 터져 나왔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일상으로 복귀한 후, 당시 어렸던 내가 생각했을 때도 그 동화 구연 발표가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것과 아직은 길지 않았던 내 인생의 흑역사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 흑역사는 그리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내 오른손에는 웨딩 피치 인형이, 왼손에는 요술봉이 있었으며, 만화책과 비디오 테이프가 눈 닿는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 확실한 보상물이 내가 큰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중2, ‘15세 영화’의 담장을 넘다.
영화 매표소 앞에서 우리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다. 울먹이며 들여보내 달라고 애원 같은 설득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만) 15세 이상 관람가’ 마크가 찍힌 영화는 볼 수 없는 15세였던 것이다. 당시 나이 검열의 정도가 영화관마다 달랐다. 일일이 학생증을 확인하고 학생증이 없으면 돌려보내는 깐깐한 영화관도 있었고, 학생증을 안 가져왔다고 하면 나이와 생일을 물어보고 믿어주는 너그러운 영화관도 있었다.
그날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보고 싶은 몇몇 아이들이 함께 학원 땡땡이를 불사하며 큰맘 먹고 영화관을 찾은 날이었다. 학생증 검사가 마음에 조금 걸리긴 했지만. 들뜬 기분 탓에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우리가 찾은 영화관은 깐깐쟁이 영화관이었다. 1층 출입구로 내려온 우리에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마음이 동시에 불타올랐다. 중일 셋은 꿈틀꿈틀 잔머리를 굴려 ‘영화관을 찾은, 너그러운 어른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임시 보호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결국 엘리베이터 앞을 서성이던 우리는 몇 분 후에 귀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유독 친화력이 있던 내가 나서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15세 이상 관람할 수 있는데, 생일이 안 지났다고 15세가 못 보는 건 이상하다’며 우리 편을 들어주셨다. ‘역시 세상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내 편’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귀인들의 손녀가 되어 당당하게 영화관에 입장하였고 ‘태극기 휘날리며’의 감동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나서 우리의 마음에 더욱 선명하게 남았던 것은 영화의 내용보단 원하는 바를 함께 성취했던 우리의 소소한 영웅담이었다.
3. 고1, 위기의 발표가 내 안의 나를 깨우다.
모둠 회의를 하면서 내가 이 모둠을 이끌어야겠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과거의 나에게 묻고 싶지만 내가 했을 법한 대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그때의 나는 그랬다. 우리 모둠은 함께 내용 조사를 하고 ppt를 만들고 대본을 작성해서 짧은 연극 형식의 발표를 준비했다. 발표를 하는데 연극까지 하다니. 이 또한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고 묻고 싶지만 글쎄, 그때의 나는 꽤 적극적인 고등학생이었던 것 같다. 대본을 짰던 나는 모둠원들과 서로 잘 외워야 한다며 당부 혹은 격려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발표 당일. 이게 웬걸. 대사를 해야 하는 친구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민망함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선생님’ 역할을 맡았던 나는 ‘학생’ 역할을 맡은 친구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곧바로 나의 대사를 수정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나의 입에서는 친구의 입에서 나와야 했던 대사들이 나왔다. 그리고 친구가 ‘학생’ 역할에서 쉽게 대답할 수 있을 법한 대사들을 치며 우리 모둠의 발표 시간을 채워나갔다. 무사히 박수를 받으며 수행평가 발표를 마쳤던 기억이 난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은 ‘00이가 원맨쇼했어.’라며 악의 없이 웃었다. 민망하게 웃었던 친구도 나와 함께 안도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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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역할이 아닌 진짜 직업 교사가 된 지금. 길지 않은 교직생활을 하며 ‘나는 왜 이렇게 리더십, 카리스마 혹은 순발력이 부족할까’라고 느꼈던 순간이 꽤 많았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며 내 안의 그것들을 꺼내 보였던 과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위기의 순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되는 히어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내 안의 리더십, 카리스마, 순발력 그 녀석들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슬며시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