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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혜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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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쓰다 Jun 10. 2020

피아노를 다시 칠 수 있을까.

<내일도 칸타빌레>를 보면서 아픈 기억에 고개를 묻는다.

 클래식을 연주하던 내 손가락은 잠시 멈춰있다. 나는 음악대학 피아노 전공을 꿈꾸던 학생이었다. 데크레셴도와 닮은 애정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피아노를 열렬히 사랑했다. 다섯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건반과 함께였다. 발레와 가야금, 태권도, 수영, 스케이트를 배우면서도 피아노 레슨은 멈추지 않았다. 피아니스트는 엄마의 꿈이었다. 으레 딸은 엄마의 꿈을 먹고 자라니까 나도 피아노를 배워야 했다. 일곱 살 때쯤 꽤 잘한다는 말을 들었고 초등학생이 되자마자 콩쿠르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노력한 만큼 좋은 성과가 있었다. 내 보잘것없는 트로피를 훈장 삼아 맑게 웃는 엄마의 미소가 좋았다. 


 나와 세트로 묶여 피아노 교습소를 다니던 동생이 어느 날부터인가 학원을 가지 않겠다고 떼썼다. 동생은 피아노 선생님이 때렸다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나와 동생은 엄한 집안에서 함께 자랐지만 내가 동생보다 곱절은 더 맞으며 자랐기에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체벌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으며 내가 연습을 충분히 안 했기 때문에 응당 받아야 할 벌이라고 여겼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나와 동생이 선생님께 맞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여전히 나를 그 학원에 떠밀었다. 동생은 그날 이후로 그만뒀다. 소질이 없었고 연습을 안 했기 때문에 더 맞을 우려가 있어서였다. 나는 재능이 있으니까 더 다녀야 했다. 선생님의 기분이 나빠서 책을 집어던져도, 그 책을 주우라고 소리쳐도, 내 손등을 자로 때려도, 한 음이 틀렸다며 등짝을 후려쳐도. 나는 재능이 있으니까.


 열 살쯤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듣고 피아노로 그 음을 옮겨 치기 시작했다. 내게 절대음감이 있다는 걸 안 선생님은 주기적으로 테스트를 했다. 선생님은 엄마에게 피아니스트로 키워보자고, 전국 콩쿠르를 나가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시집을 간다며 피아노 교습소를 청산하고 동네를 훌쩍 떠났다. 중학생이 되고 점점 가세가 기울었지만 여전히 피아노를 배웠다. 허름하고 좁은 거실에 어울리지 않는 피아노가 놓였다. 그마저도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아 연습할 수 없었고 일주일에 두 번 개인 레슨 때만 연주했다. 좋지 않은 형편에 한 달 레슨비조차 빠듯한데도 동네 피아노 학원을 빌려 연습실 삼았다. 하교 후 밤 열 시까지 주야장천 연습만 했다. 나는 피아노를 치는 것보다 내가 연습실에 들어가 피아노를 치는 동안 학원 소파에 앉아서 흐뭇한 얼굴로 책 읽는 엄마가 좋았다. 


 정확히 열여덟 살부터 엄마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서울에서 음대로 유명한 대학교수의 레슨을 받으면서, 한 번 그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경악할만한 레슨비를 흰 봉투에 담으면서 나는 서서히 현실을 마주했다. 꾸역꾸역 대학교에 들어간다 해도 따로 선생님께 과외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과 유학이 필수라는 말은 나를 옥죄였다. 잘할 자신이 없었다. 클래식 공부를 하려고 책을 사도, 좋은 공연을 관람해도 늘 나보다 우수한 인재가 넘쳤다. 그들은 영재였고 천재였지만 나는 동네에서조차 일등이 아니었다. 생애 처음 무대에 올라서서 피아노 연주를 했을 때도 떨지 않았던 내가 점점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피아노 입시생이라는 핑계로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공부를 했다. 연습실로 곧장 향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다. 내신 성적이 전교권에 들자 친구들과 선생님이 의심했지만, 엄마는 피아노가 아닌 것을 잘하는 내 모습을 또 다른 형태로 좋아했다. 시나브로 포기에 젖어갈 때 엄마도 함께였다. 외롭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인문계열 전공으로 눈길을 돌렸다. 모든 게 자연스러워서 포기랄 것도 없었다. 


 흔쾌하고 유연한 결정이었지만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은 식지 않는 법이다. 피아노가 꼴 보기 싫었다. 대학 입학 전에 피아노를 팔고 악보를 버렸다. 닳고 닳아 꾀죄죄한 베토벤집, 쇼팽 에튀드, 발라드, 리스트집까지 전부 버렸다. 연필과 볼펜, 빨간펜으로 악보집에 적어둔 가이드를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교회에서 늘 찬양 반주를 했지만 클래식과는 열아홉 살 때 이별했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그 노랫말이 맞았다. 20대 초반, 모든 노래가 지겨워서 홧김에 틀었던 클래식이 괜찮았다. 아니, 좋았다. 그래서 이제는 입시곡으로 연습했던 곡까지 거뜬히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 친구에게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를 소개받았다. 그 유명한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의 한국 버전이었으나, 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 연출과 연기로 폭삭 망했단다.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며 즐거웠으니 <내일도 칸타빌레>도 괜찮겠지. 내가 완전히 괜찮을까,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인공 '설내일'의 트라우마를 알게 되면서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https://youtu.be/Lg8jQbnC_7E

잠이 오지 않아 좌로 누워 이 장면을 보다가 눈물을 펑펑 쏟았다. 나는 아프지 않았다고, 꽤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나는 그날로 돌아갔다. 선생님의 기분이 어떤지 살피느라 눈알을 굴리고, 선생님이 내팽개친 책을 빠르게 주워오려다가 무릎을 찧고, 선생님이 손가락과 손등을 딱딱 때릴 때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꾹 참았던 그때로. 고통스러웠다. 이 장면이 '견뎌냈으며 이미 지나버린 기억'을 호비고 짓이겨서 힘에 부쳤다. 새삼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손가락 힘이 약하다는 충고에 밤낮없이 손가락 사이를 찢었던 날들이 쌓여 약지 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보기 싫게 굽어있었다. 베토벤을 재현해보겠다며 무게를 실어 연주하다가 마침내 손가락 끝에 피가 고였을 때, 그 희열이 떠올라서 눈을 감았다. 그만두길 잘했다. <내일도 칸타빌레>의 '설내일'이 즐겁게 연주하기를 바랐던 것처럼 나도 즐거움이 멈췄을 때 그만두었으니까. 나 참 잘했구나.


 그런데 실컷 울고 나니 피아노, 그러니까 클래식을 연주하고 싶었다. 내 손가락으로 다시 베토벤을 연주할 수 있을까. 공부하고 책 읽느라 납작해진 엉덩이로, 이미 물렁물렁해진 손가락으로 단단한 연주를 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를 변태 기질이 발동하자 실험해보고 싶었다. 기꺼운 마음으로 베토벤 2집을 주문했다. 배송추적 버튼을 누르고 흰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들뜨기 시작했다. 즐거운 마음 순도 100퍼센트로 기다린다. 노래하듯이, 칸타빌레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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