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아무튼, 디지몬>을 읽고
어린 시절, '포켓몬'을 좋아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디지몬'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두 작품 모두 인기 작품이었지만 포켓몬과 비교하면 디지몬 어드벤처는 확실히 어두운 작품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이세계로 끌려 들어온 아이들은 끊임없는 싸움을 치뤄야했고, 그 와중에 다치고 상처받으며 또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기까지 한다. 천선란 작가의 <아무튼, 디지몬>을 읽으며 나 역시 유년 시절, 그리고 자라오는 과정에서 줄곧 내 곁에 남아있는 디지몬의 존재를 떠올렸다.
<디지몬 어드벤처>는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디지몬을 진화시킬 수 있는 문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가진 '문장'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하지만 또 동시에 그것으로 얼마나 약해질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작품 속 태일이는 '용기'의 문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남들이 두려워하는 일에 앞장서서 나선다. 하지만 어떤 때에는 그 용기가 독이 되기도 한다. 자신과 주변을 소중히 하지 않고, 무작정 부린 용기는 태일이의 디지몬 아구몬이 주변 모두를 파괴하는 디지몬으로 진화하게 만든다. 엉망진창으로 모든 것을 부수고 난 후 아구몬은 지친 모습으로 아구몬의 진화 단계 전인 코로몬으로 돌아간다.
나는 디지몬의 진화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도, 그 진화가 완전한 성장이 아니라는 점도 좋다. 디지몬은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진화할 수 있고 다시 돌아온다. 잘못 진화하면 다시 진화하면 된다.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무언가 그릇된 것처럼 느껴지면 나는 이 문장을 자주 상기한다. '괜찮아, 다시 진화하면 돼.' (46)
태일이는 이후 아구몬이 잘못 진화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진짜 용기를 내야 할 상황에서 한 발짝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마주한다. 하지만 납치당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고압 전류 앞에서 선 태일이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만류하는 한솔에게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물러난다면, 정말 무언가 잃어버릴 것만 같다고. 그리고 태일이의 문장은 다시 빛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강한 힘으로 동시에 가장 나약해질 수 있구나.
그 깨달음은 오랫동안 내가 살아가면서 힘주어 자주 곱씹는 말이었다. 디지몬은 아이들 각자의 결핍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하지만 아이들은 각자의 디지몬과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약함과 강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디지몬은 아이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아무튼, 디지몬>에서는 말한다. 디지몬의 진화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무엇도 완전한 성장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어떤 모습이든 다시 우리의 모습을 선택할 수 있다. 어머니가 자신의 ‘디지몬’인 것 같다는 천선란 작가의 고백을 보며 우리 스스로를 우리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난 후 자신을 잃고 살아가던 천선란 작가는 어머니가 기억하는 자신의 모습이 ‘소설을 쓰는 모습’이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소설을 쓰는 나’를 놓지 않기 위해 다시금 글을 쓰기로 다짐한다. <디지몬 어드벤처> 속 디지몬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진화한다. 아이들의 문장 역시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으로 반짝인다. 어머니로 인해서 남들과는 다른 힘든 시절을 보낸 작가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디지몬 어드벤처> 속 디지몬처럼 느껴진다. 자신을 강하게도 약하게도 만들어주는 가장 소중한 존재.
<디지몬 어드벤처>의 모두가 태일이와 같지 않다. 미나는 더 이상 누군가와 싸우고 괴로운 것이 싫다며 적을 치료하는 모습을 보인다. 태일이가 앞장서서 나설 때 매튜는 언제나 태일이와 대립하며 나아가는 것보다 안전한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 속 누구도 완전하게 옳지도 나쁘지도 않다.
각자 다른 아이들이 서로 다투고 싸우고 화해하며 자기 자신을 깨닫고 성장한다. 그 무엇도 잘못된 것은 없다. 자기만의 문장으로, 자기만의 디지몬을 진화시킨다.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낸 어린아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이야기들은 나에게도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좀 더 대단한 모험이 있을 거라고. 어쩐지 초라해 보이는 내 자신에게도 꽤나 멋진 ‘문장’이 있을지 모른다고.
천선란 작가가 보여주는 디지몬에 관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나를 자꾸만 디지몬과 함께 모험하기를 꿈꾸던 어린 시절로 데려갔다. 이 책은 디지몬과 이별하는 이야기라고 쓰였다. 누구나 어린 시절의 친구와 이별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매일 어른의 모험을 하고 있다. 때론 그건 디지몬 세계의 잔혹함만큼이나 무섭고 끔찍하다. 무엇과 싸우는지 모르고도 매일 싸우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때론 무조건 내 옆에서 함께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디지몬이 있었음 좋겠다. 아직은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은 어른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