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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허지원,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를 읽고

by 양이

기르던 첫 고양이 '우리'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유골함을 끌어안으며 덜컹거리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머릿속에는 같은 질문만이 하염없이 맴돌고 있었다.


나 때문인가.


이미 싸늘하게 식은 아이를 상자에 담아 받았을 때, 나는 그 상자를 열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휴대폰으로 검색해 제일 상단에 뜨는 24시간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저 빨리 그 일을 끝내고 싶었다. 내게 닥친 일을 마주하는 일이 너무나 두려웠기에 그 순간의 나는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너무나 죽음을 원하던 시기에 살고 싶은 마음으로 고양이를 입양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내가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만큼이나 비겁한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떠났다. 채 1년을 살지 못하고.


장례를 끝마치고 돌아온 방 안에 앉아 울면서도 밤새도록 어떤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죽음을 원했기 때문에 내 불행의 기운이 그 애를 죽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나 같은 반려인을 만나서, 함께해서 이렇게 빠르게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이 생각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해서 도통 사실이 아닐 리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이 나를 위로해줄 때마다 속으론 '내가 죽음 같은 것을 원하는 사람이라서 나 대신 내 고양이가 죽은 것이 분명하다'고 읊조렸다.


인과관계도, 논리라고는 없는 그 사실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 생각을 떠밀리듯 믿고 있었다. 누군가 첫째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때는 잠들어있던 고통이 다시금 내게 말을 거는 듯 했다.


만약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누군가 내게 나와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면 나는 그를 꼭 안아주면서 그렇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네가 얼마나 그 애를 사랑했는지 알아. 그래서 지금 얼마나 괴로울지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내 스스로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수 없었다. 나는 충분히 나 자신을 질책하고 비난하고 화를 내야만 했다. 점차 그런 마음마저 두려워 일부러 그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더는 안 하게 됐다.


하지만 내 옆에는 나의 둘째 고양이 '우주'가 있다. 나는 언젠가 맞닿을 슬픔을 살피듯 우주를 바라본다. 그 안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허지원 작가의 <나도 아직 나도 모른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기대를 하지 않으려 애쓰지 마세요.
당신의 기대는 한 번도 죄였던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그냥 순수하게 기대했던 것뿐이고, 당신의 기대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아무 이유 없이 운 좋게 성취될 때도 있고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기대는 죄가 없고, 당신도 죄가 없습니다.
그냥 상황이 그랬습니다.
당신에게 불행감을 가져오는 사건들은 많은 경우 당신의 노력이나 기대와는 상관없이 운과 상황에 의해 좌우됩니다.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은 한다고 했습니다. 수백번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일으켜가며 어떻게든 끝까지 해 보려했습니다. 당신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주인공이 당신이었으면 좋었겠지만,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 따위는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억지로 만들어 낸 가치가 아니어도, 당신과 나는 이대로 충분합니다.
기대하세요.
내일의 날씨, 이따가의 점심 메뉴,
오랜만의 시내 외출, 개봉할 영화와 새로운 드라마.
또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에도 다시 일어나는 힘은 지치지 않는 기대에서 나옵니다.
오늘 점심으로 먹은 달걀 샌드위치가 형편없었대도 저녁에 먹을 소고기덮밥은 괜찮을 수 있습니다.
이번의 성과가 형편없었대도 내일 보기로 한 영화는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취미는 '기대하는 것.'
백 번을 실망한대도. (191-192)


나는 내 첫째 고양이가 나로 인해서 행복해지길,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행복해지길 그 누구보다 바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그 기대가 송두리째 무너졌다는 사실에 지레 겁먹고 있었다. 괜찮다고 믿었던 순간에도 여전히 나의 기대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우리가 그렇게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의미 같은 것을 찾으려고 나를 괴롭혔다. 불행의 조각 같은 것을 줍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내가 나를 긍정하기 위해 만들었던 수많은 순간들 역시 함께 기억한다. 나는 우리를 떠올리며 다시금 기억을 고쳐 본다. 이를테면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것들. 그가 나에게 허락해줬던 마지막 순간 같은 것. 나의 몸 위로 처음으로 올라와 간식을 받아먹을 때 내가 느꼈던 환희와 고마움을, 침대에 앉아 내가 눈을 뜨자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을 때의 낯선 설렘을 떠올린다.


우주는 간혹 힘 조절을 못 하거나 잘못 착지해 나에게 상처를 입히곤 한다. 그것은 아주 작은 흔적으로 남거나 며칠이 가도록 사라지지 않는 깊은 흉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 아무런 의도는 없다. 때론 상처 입더라도, 나는 그 애가 내 다리 위에 앉아 나보다 조금 더 높은 체온을 전해줄 때, 보드라운 털이 내 몸을 부빌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때론 피가 나 연고를 바르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이 순간의 행복을 평생 끌어안을 것이다. 그건 아마 내가 이 삶을 바라보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때론 어떤 누구의 아무런 의도 없이도 내가 상처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지금의 행복을 끌어안게 되리라는 사실을 나는 다시금 배웠다.


언젠가 우주가 떠나게 된다면, 그때에는 어떤 마음으로 나 자신을 상하게 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있는 힘껏 슬퍼하다가 지금의 마음을 다시금 기억하겠지. 아마 우주는 평생 내 마음 같은 건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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