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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란 Jul 28. 2020

드럼일기(1) 갑자기 오늘부터 드럼을 친다고

별안간 시작된 드럼 라이프

드럼을 치기로 결정한 것은 계획에 없는 충동이었지만 내 인생에 충동을 편입시켜 봐야겠다는 건 계획에 있었다. 2018년부터 취준 1년과 이직 준비 1년을 합친 2년의 시간, 나는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하루하루를 쪼개서 계획을 짜며 살았고, 오늘과 순간에 충실하기보다는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의 행복을 믿고 인생을 유보하며 지내왔었다.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한 지 6개월 정도가 지나고, 내 인생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1년에 천만 원을 더 주는 직장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잃어버린 '현재'를 찾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쓸 데 없는 일


사회가 정해 놓은 '정상 코스'가 아닌 길로 가 본 적 없었고, 정상 코스를 정해진 나이에 착착 밟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만이 가치 있는 일이었고, 그 일 밖의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건 옳지 않은 일로 여겼던 인생으로부터의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쓸 데 없는 일'을 하고 싶었다. 선생님의 칭찬을 절대 받을 수 없고 이력서에 적을 수도 없고 생산적이지 않은 일, 장기적인 계획도 없고, 이걸 해서 뭘 얻어내겠다는 이해타산적인 고려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일, 금방 그만둘 수도 있지만 일단 한 번 내 시간을 써보고 싶은 일. 그 첫 시작은 드럼이었다.



왜 하필 드럼이었나


건반악기(피아노)-관악기(플루트)-현악기(베이스)를 거쳤던 내 인생을 화려한 타악기로 싹 감싸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피아노는 꽤 오래 배워서 지금도 악보를 좀 뜯어보면 대충 연주가 가능하지만 플루트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이 것들은 내 의지로 시작한 게 아니어서 온전히 몰입하면서 배우지는 못했고, 대학 때 처음 배운 베이스는 100% 나의 선택이었지만 두어 번 공연을 하고 나니 재미가 없었다. 베이스는 소리가 좋기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듣기에는 소리가 있는지 없는지 잘 들리지도 않고 그렇게 튀는 악기가 아니어서 항상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베이스는 밴드의 중심을 잡아주는 핵심 악기이지만, 가장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소리를 풍부하게 하는 그림자 같은 악기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밴드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연주를 지휘하는 드러머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조용히 간직해왔던 것 같다.



갑자기 오늘부터요?


악기를 구입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 시작했다가 금방 질릴 수도 있고, 악기에 돈을 쓰고 싶지도 않았고, 6평짜리 오피스텔에 악기를 둘 곳도 없었다. 무거운 베이스를 이고 지고 다녔던 경험도 참 별로였다. 필연적으로 학원에 가서 연습해야만 하는 악기를 생각해 보니 피아노를 다시 제대로 배워볼지, 드럼을 쳐볼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퇴근하고 지하철 역에서 나와서 집에 들어가기 전 갑자기 학원에 등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에서 실용음악학원을 검색해 본 다음에 가장 가까운 곳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서 드럼 배울 수 있냐고 물어봤다. 원장님 본인이 직접 가르치신다고 했다. 그럼 피아노는요? 피아노는 외부에서 선생님이 정해진 요일에만 오신다고 했다. 이 학원은 드럼이 메인이구나 싶어서 그럼 드럼을 등록하고 싶다고 얘기한 뒤 30분 뒤에 갈 테니까 바로 첫 수업을 받을 수 있냐고 물어봤다. 선생님은 나의 직진에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일단 오시라며 새로운 수강생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드럼을 치게 되었다. 친구들한테 갑자기 드럼 치러 왔다고 했더니 친구들도 다 당황했다. 나만 평온했다.



이 연재를 시작한 이유는


드럼을 치면서 올라오는 여러 생각들이 있다. 단순히 오늘은 어떤 진도를 나가서 뭘 잘 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나 자신에게 드럼을 선물하고 나서 생긴 인생의 변화를 기록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 취미를 하나 시작해서 재밌게 지낸다는 문장 사이에 켜켜이 존재하는 알아차림의 순간들이 참 새롭고 소중하다. 이를테면, 가끔 연습을 끝내고 나면 알 수 없는 평온함과 고요함을 경험하는 순간이 있다. 지금 이 순간, 내 팔다리의 움직임과 소리를 듣는 귀의 감각에 예리하게 집중한다. 그러고 나면 난 명상을 막 마친 것처럼 삶으로 다시 떠오르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차차 풀어나갈 이야기.


MBTI 과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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