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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의 전쟁

by 누런콩

“뒤에서 보니깐 늘씬하다 야.”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내게 엄마가 말했다. 내 기분은 제법 좋아졌지만 툴툴거렸다. “거짓말하지 마, 뚱뚱하지 뭘.” 엄마는 이내 내게 회사 사람들은 다 날씬하냐고 물어왔다. 나는 나만큼 살집이 있는 여직원은 없다며 내가 제일 뚱뚱하다고 대답했다. 나는 내가 뚱뚱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렇게까지 뚱뚱해 보이는지 엄마에게 계속 물었다. 엄마는 “넌 뚱뚱하지 않아”라고 확언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말을 돌렸다. 결국엔 내 말에 대꾸하지 않기로 정한 듯 입을 닫았다. 어쩌면 나는 엄마에게서 “그렇게까지 뚱뚱하진 않아”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굳이 엄마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내가 아닌 타인에게 그래도 내가 꽤 봐줄 만하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었다. 이 정도로도 충분히 괜찮다는 말이 왜 그리도 갈급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50보단 100에 가까운 숫자로 산다. 대사가 망가졌는지 살은 잘 빠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다이어트를 찔끔했다가 요요가 오기를 수십 번 반복해서 살이 잘 찌는 체질로 변해버린 것 같다. 근육이 빠진 자리를 지방이 채워버렸나. 기초대사량은 떨어지고 지방이 지방을 부르는……. 날씬했던 과거의 모습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비만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몸무게로 산 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살이 쪘을 땐 병원에서 처방받은 정신과 약을 핑계 삼았다. 의사 선생님은 그 약이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어 살을 찌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먹는 약은 살찌는 것과는 무관하단다. 의사 선생님은 아예 그렇게 못을 박았다. 억울하다. 내가 뭐 하루 네다섯 끼를 먹는 것도 아니고. 더 우울한 건 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뜀박질까지 하는데도 살이 잘 안 빠진다는 거다. 도무지 모르겠다. 왜 몸무게는 변함이 없는 건지. 있는 그대로의 몸을 받아들이자고 머릿속으로 수백 번 되뇌어봐도 소용없다. 가슴 깊숙한 곳에선 지금의 모습을 거부한다. 이 몸은 잠시 거쳐 가는 것뿐이라고, 금방 다시 날씬한 나로 돌아갈 거고 그게 진짜 내 모습일 거라고.


뚱뚱한 사람은 쉽게 ‘타겟’이 된다. 사람들은 내가 정크 푸드를 와작와작 씹어먹고선 드러누워 버리는 상상을 할 것이다. 하루 종일 그렇게 먹고 눕고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말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부지런한 편이다. 피자나 햄버거 같은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많이 먹기는 하지만 그만큼 많이 움직인다. 살찐 건 내 책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가해지는 모든 걸 허용하는 건 아니다. 지금보다 한 20킬로는 덜 나갔을 시절에도 나는 흔한 먹잇감이었다. 남자애들은 내가 다리를 올리고 앉아 있으면 코끼리 다리라고 놀려댔다. 몸집이 커다랗다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언젠가 체육관 코치와 친하게 지냈던 적이 있다. 그는 운동 자세를 잡아주면서도 내 몸무게를 수시로 어림했다. 그가 내 SNS에 얼굴이 터질 것 같다고 댓글을 달았을 때 나는 그 체육관을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었다. 뚱뚱한 사람을 향한 사람들의 무례함은 말 그대로 ‘숨 쉬듯이’ 이루어진다. 하도 자주 반복되어서 그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힐 수 있는지 인식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채로.


왜 뚱뚱하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왜 뚱뚱하면서도 멋진 몸은 잘 비추지 않는지 의문이다. 뚱뚱하면서도 균형 잡히고 건강한 몸은 너무나 많다. 그런데도 세상은, 특히나 한국 사회는 그런 몸들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물론 어떤 몸이나 미디어가 조명하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다양성이 보장되었으면 좋겠다. 만약 살집이 있으면서도 근사한 몸을 어딜 가나 볼 수 있다면 이 정도로 자기혐오가 깊어지진 않을 것이다. 마르고 탄탄한 몸을 가지는 방법에 대해 말하는 콘텐츠를 보고 난 후면 거울 속 내 자신이 싫어진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그렇게 된다. 시선과의 전쟁에는 내가 나를 보는 시선 또한 포함되어 있다. 남들이 나를 비난하지 않더라도 내가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면 끝이다. 사회의 이상향과는 동떨어져 있는 내 몸을 내가 싫어하게 만드는 게 과연 자의일까 타의일까.


살에 대해서 나는 꽤 자주 쓴다. 내가 왜 살찌게 되었는지 변명할 때도 있고 살찐 나를 받아들이자고 다짐할 때도 있다. 그냥 푸념일 때도 많다. ‘살’은 이미 내게 너무나 커다란 삶의 주제가 되어버렸다. 그건 내가 살이 찌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보이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떤 모습이든 상관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까? 나도 내 겉모습에 대해서 그만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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